야산을 뒤덮은 아까시나무 꽃향기... 데라우치 초대 조선 총독은 경인 철로에 심을 수만 그루의 아까시나무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아까시나무는 번식력이 강하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땔감용으로 산에도 많이 심었다. 이로 인해 일제가 우리의 산하를 황폐시키기 위해 심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까시나무는 우리나라 꿀의 70% 이상을 생산하는 밀원식물이다. 지금의 아까시나무는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녹화를 위해 심은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되자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황성일보에 실렸다. 민영환은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