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44

44. 마지막 황제 - 가이즈카향나무

야산을 뒤덮은 아까시나무 꽃향기... 데라우치 초대 조선 총독은 경인 철로에 심을 수만 그루의 아까시나무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아까시나무는 번식력이 강하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땔감용으로 산에도 많이 심었다. 이로 인해 일제가 우리의 산하를 황폐시키기 위해 심었다는 설도 있지만 아까시나무는 우리나라 꿀의 70% 이상을 생산하는 밀원식물이다. 지금의 아까시나무는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녹화를 위해 심은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되자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황성일보에 실렸다. 민영환은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

43. 누구를 위해? - 자두나무

푸릇푸릇한 꽃받침을 가진 자두나무는 나무 ‘목木’에 아들 ‘자子’가 합쳐친 오얏 이李, 오얏나무였다. 이후 열매가 붉다는 자리紫李에서 붉은 복숭아 같다는 자도紫桃를 거쳐 호두, 앵두처럼 발음하기 쉬운 자두로 되었다. 자두나무는 한때 수난을 당했다. 고려 말 오얏 이씨가 나라를 세운다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의 풍수도참설이 유행하자 고려 조정은 곳곳의 오얏나무를 베어낸 것이다. 망국의 시점에서야 미안했을까?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한 고종(1852~1919)은 이화李花를 황실 문양으로 정했다. 철종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와의 친분으로 고종을 익종(효명세자)의 양자로 들여 왕으로 만들었다.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윈윈 전략이었다.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은 철종과는 남남 같는 17촌지간이었으나 조부인 ..

42. 강화로 보내주오 - 순무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강화순무... 우리에게 꽁보리밥에 염장국이 있었다면 서양에는 호밀 빵에 순무 수프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와 러시아의 곡물 수출 금지로 인해 '순무의 겨울’이라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기도 했다. 순무는 제갈채로도 불렸다. 재배 기간이 짧고 날로 먹을 수 있어 제갈량이 전쟁 중에 비상식량으로 심은 것에서 유래한다. 콜라비는 양배추라는 독일어 '콜(kohl)'과 순무라는 '라비(rabi)'의 합성어로 양배추순무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안동 김씨는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 영조 당시 시전 상인들에게 큰 빚을 져 물의를 일으킨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로 유배됐으나 은신군은 풍토병으로 죽고 은전군은 정조를 암살하려는..

41. 꽃미남의 운명 - 삼지구엽초

매발톱 모양의 특이한 꽃... 남성은 정력에, 여성에게는 갱년기에 좋다는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다. 세 개의 가지마다 달린 세 장의 잎에서 유래하며 하루에 수차례 교미로 기를 소진한 양이 먹자마자 원기가 회복되었다는 풀이다. 이를 본 노인이 삼지구엽초를 먹고 아들을 낳았다고 할 정도다. 한자어는 음란한 양淫羊이 먹는 콩잎藿 같은 풀, 음양곽 또는 노인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버린다는 방장초放杖草다. 1834년 조선의 왕 중 최연소로 여덟 살의 헌종(1827~1849)이 즉위하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삼정의 문란과 신분 질서가 붕괴되던 때였다. 또한 순원왕후의 동생 김좌근의 안동 김씨와 어머니 신정왕후(조대비)의 아버지 조만영을 중심으로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열리고 있었다. 42세에 과거 ..

40. 냉면이 먹고 싶다 - 메밀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1936년)"의 한 장면이다. 메밀은 메(산)에서 나는 밀이다. 식감이 거칠어 밀보다 싼 곡물이었지만, 한국전쟁 후 밀가루가 대량 수입되면서 더 비싼 몸이 되었다. 메밀 가루는 도정이 제대로 안 되던 시절에 껍질이 섞여 검게 보였으나 지금은 일부러 메밀가루를 볶거나 메밀을 통으로 갈아서 그렇게 만든다. 1800년 11세에 즉위한 순조(1790~1834)의 치세는 난세의 시작이었다. 정조에 가려 있던 정순왕후의 수렴첨정을 시작으로 강력한 왕권에 의해 유지되던 붕당 간의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서 세도정치가 싹을 틔워 나갔다. ‘도를 회복시킨다’는 세도世道정치는 홍국영에 의해 외..

39. 만천명월주인옹 - 복사꽃, 가래나무

도심을 가득 메운 벚꽃과 상춘객... 그렇지만 원래 꽃 중의 꽃 복사꽃이었다. 조선시대 꽃구경도 첫째는 복사꽃, 매화나 살구꽃은 그 다음이었다. 중국 전설에 활쏘기 명수인 ‘예’가 복사나무 몽둥이에 맞아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복사나무를 싫어했기 때문에 복사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았고, 복숭아는 제사상에 올리지 않았지만 복사꽃은 부모님 살아실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효도화였다. 1776년 노론의 끊임없는 모함과 비방을 극복하고 즉위한 정조(1752~1800)는 선포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노론은 경악했다. 그 중에 홍상범은 부친 홍술해가 공금 횡령죄로 위리안치되자, 1777년 경희궁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을 일으켰다. 홍술해는 나경언의 고변을 사주한 홍계희의 아들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

38. 굴레 - 도둑놈의갈고리

파주의 서오릉... 정성왕후를 모신 홍릉의 한 쪽이 휑하니 비어있다. 원래 영조가 묻힐 자리였으나 영조의 원릉이 동구릉에 조성되면서 빈자리로 남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도둑놈의갈고리, 짚신나물 그리고 파리풀... 모두 열매에 난 낚싯바늘 모양의 갈고리로 동물의 털에 달라붙어 번식한다. 특히 선글라스 모양의 도둑놈의갈고리 열매가 앙증맞다.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의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영조... 금수저 숙종과는 달리 그는 궁녀들의 수발을 드는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흙수저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일설에 의하면 결혼 첫날밤에 손이 곱다는 영조의 말에 정성왕후가 고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답하자 이는 숙빈 최씨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평생을 박대했다고 한다. 1724년 즉..

37. 유의하겠소 - 감나무, 메꽃

탐스럽게 익어가는 감... 우리나라를 방문한 “대지(1931년)”의 작가 펄벅 여사가 경주로 가던 길에 마른 가지에 걸린 감을 보았다. 왜 따지 않느냐는 질문에 까치밥이라 설명하자, 그녀는 경주에 가지 않아도 한국을 찾은 보람이 있다며 감동해마지 않았다. 감나무는 추위에 강하고 성장이 빠른 고욤나무에 접목한다. 이를 감접이라 하며 ‘감쪽같다’는 접붙인 곳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감은 조선 20대 왕 경종(1688~1724)의 독살설에 불지폈다. 세 살에 세자로 책봉된 경종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장희빈이 사사된 후 왕위에 오르기까지 19년 동안 가시밭길을 걷는다. 그의 성격은 점차 내성적으로 변했고,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왕의 정통성은 강력한 왕권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숙종에게는 적자..

36. 정치 9단, 숙종 - 연꽃

불법을 설파하던 석가모니가 조용히 연꽃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많은 제자들 중에 오직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고, 석가모니는 그에게 불교의 법통을 전수했다. 이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염화미소拈華微笑다. 염화는 꽃을 손에 든다는 뜻이다. 부처가 전하고자 했던 깨달음과 가섭이 미소를 띤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조선 제19대 왕 숙종(1661~1720)... 인현왕후와 장희빈과의 스캔들로 유명한 그는 14세에 즉위했지만 수렴첨정 없이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여 다혈질에 변덕이 심한 성격대로 거침없이 왕권을 휘두른 왕이었다.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닐 정도로 화증이 심했다. 명성왕후 조차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과 저녁에 다르니 감당할 수가 없다"고 혀를 내..

35. 뭣이 중헌디? - 가문비나무

피라미드 모양의 당당한 수형을 가진 가문비나무는 전나무와 비슷하지만, 구과와 잎이 아래로 처져 있다. 나무껍질이 검다는 흑피목黑皮木에서 유래한 가문비나무는 고산지대에 자생하며 관상수로 심는 것은 대개 독일가문비나무다. 재질이 연한 목재는 펄프의 원료로 쓰인다. 1659년 현종(1641~1674)이 조선 제18대 왕으로 즉위한다. 북벌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효종,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던 숙종, 그 사이에 끼어 있어 존재감이 덜한 현종이 맞닥뜨린 것은 예송논쟁이었다.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에서 비롯된 예송논쟁은 왕권과 신권, 서인과 인조 이후에 성장한 남인의 권력 투쟁이었다. 두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신분제에 대한 저항이 커져갔다. 조선은 중화의 나라 명이 멸망하자 소중화를 자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