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44

24. 비운의 소년 군주 - 협죽도

기다란 잎과 줄기가 대나무를 닮은 협죽도夾竹桃... 제주에서는 가로수로도 심었으며 천남성, 투구꽃, 비상 등과 함께 사약의 재료로 쓰였다. 하지만 사약은 재료, 제조법 그리고 사람에 따라 약효가 다르기 때문에 사극처럼 마시자마자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천남성은 독성을 제거한 후 이독공독以毒攻毒의 약재로도 쓰였다. 이로 인해 사약을 마신 후 고열과 구토, 어지러움 등으로 죽도록 고생하다가 죽기도 했다. 1452년 단종(1441~1457)이 즉위하자 고명대신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는 황표정사를 실시했다. 이는 관리를 임명할 때 추천된 3인 중 한 명의 이름에 고명대신들이 황표로 표시하면 단종이 추인할 수 있도록 문종이 만든 제도였다. 고명대신들은 안평대군과 함께 수양..

23. 조금만 더 살았다면... - 앵두나무

새빨간 열매... 꾀꼬리가 먹는 복숭아 같다는 앵두다. 줄기 밑동에서부터 가지가 많이 갈라지는 앵두나무는 온 동네의 소문을 퍼나르는 우물가에 흔한 나무였다. 세종은 앵두를 유난히 좋아했다. 문종(1414~1452)이 세자 시절에 궁궐에 직접 심은 앵두나무에서 앵두를 따 올리자 세종은 외간의 그 무엇도 세자가 올린 것에 비할 수 없다며 기뻐했다. 앵두는 목이 타는 듯 마르는 증세가 나타나는 소갈증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문종은 소헌왕후가 생전에 맛보고 싶어 했던 설탕을 구하자 눈물을 흘리며 영전에 올린 효자였다. 조선 최초의 적장자로 즉위한 문종은 7년의 대리청정을 포함하여 29년간 세자 수업을 받은 준비된 왕이었다. 반면에 2년의 짧은 재위 기간으로 인해 병약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았지만 그는 체격이 크고..

22. 세종을 가진 나라 - 오리나무

헌인릉에 불두화보다 유명한 것은 오리나무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오리나무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오리나무는 오리마다 길가에 심어 이정표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별다른 특징이 없는 오리나무를 오리마다 심었을까? 십오리마다 심었다는 히어리와 이십리마다 심었다는 시무 (스무)나무도 구분이 쉽지는 않다. 조선시대 초에는 자나 막대기, 새끼줄, 노끈, 먹줄 등으로 거리를 측정했으나, 오차가 컸다. 이에 장영실은 세종의 명으로 중국의 거리측정장치를 개량한 ‘기리고차記里鼓車’를 제작한다. “산수 간에 한가로이 노닐기를 이처럼 걱정이 없는 자는 이 천하에 오직 나 하나뿐이다. 중국 역대 제왕의 부자 사이도 진실로 나의 오늘과 같지 못하였고, 고려 때의 충숙왕과 충혜왕 사이에도 또 비평할 만한 것이 많으..

21. 변심의 아이콘 - 수국

헌인릉에서 만난 둥근 공처럼 수북하게 핀 꽃... 수국으로 착각하기 쉬운 불두화佛頭花다. 꽃이 불상의 머리를 닮은데서 유래하며 연녹색으로 피어 하얗게 변한다. 수국水菊은 ‘물을 좋아하는 국화’라는 뜻이다. 비단으로 수 놓은 둥근 꽃이라는 수구화繡毬花가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가장 큰 차이는 잎이다. 불두화 잎은 오리발처럼 세 갈래인 반면에 수국은 둥근 잎이다. 불두화와 비슷한 나무수국은 잎 모양이 계란형이다. 고려 말, 태조와 신덕왕후처럼 태종은 신진사대부의 딸인 원경왕후와 정략 결혼한다. 원경왕후는 고려 말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여흥 민씨로 조선 개국의 한 축을 담당한 여걸이었다. 그러나 처가의 도움으로 두 차례 왕자의 난 끝에 즉위한 태종은 변했다. 1405년 창덕궁을 짓고 한양으로 천도한 태종..

20. 이런들 저런들 - 칡, 등나무

그 누구보다도 조선 건국에 진심이었던 야심가 태종 이방원... 그는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에게 최후 통첩을 날린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정몽주의 답가는 ‘단심가丹心歌’였다. 이 시조로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지만 실상은 그도 우왕과 창왕을 폐하는 데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을 정도로 권력지향적이었다. 정몽주를 척살한 이방원은 태조의 눈 밖에 났으나 조선 개국의 걸림돌을 제거한 일등공신이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드렁은 논밭 가장자리에 작게 쌓은 둑이나 언덕으로 ..

19. 횡설수설 정몽주 - 억새

하늘공원에서 만난 짓밟고 밟아도 되살아 난다는 억세고 억센 억새... 이름과 달리 그 모양이 단아하다. 가요 ‘짝사랑(1936년)’의 ‘아~ 으악새 슬피 우니’에서 으악새는 왜가리의 별칭인 왁새나, 초막 지붕인 이엉을 엮는 억새라고 하지만 작사가는 뒷산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그리 들렸을 뿐이라고 했다. 지금은 가을이면 곳곳에서 억새 축제로 인파가 몰리지만, 모든 권력을 빼앗긴 노년의 이성계에게는 말발굽 박차고 달리던 그리운 고향산천의 풀이었다. 34대 공양왕은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정몽주를 지렛대 삼아 고려 왕조를 지키려 했다. 1363년 여진족 토벌에서 이성계와 처음 만난 정몽주는 위화도회군과 우왕과 창왕의 폐위에 뜻을 같이 했던 이성계의 핵심 참모였다. 정몽주는 고려를 지키려는 온건파 사대부와 이..

18. 이밥 먹는 나라 - 이팝나무

도올 김용옥의 ‘우리는 누구인가?’ 유튜브 강의... 그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설명한 ‘이밥’의 이팝나무를 떠올린다. 이팝나무는 소담스럽게 핀 꽃이 흰 멥쌀(입쌀)로 지은 이밥을 수북하게 담은 고봉밥과 비슷하다는 이밥나무 또는 24절기 중 하나인 입하立夏 무렵에 꽃이 핀다는 입하목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왜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을까? 이밥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민간 어원설이 전한다. 1371년 신돈의 죽음과 함께 개혁에 실패한 공민왕은 문란한 사생활에 빠져 들었다. 공민왕은 미소년으로 구성된 자제위와 남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제위를 후궁들과 동침시켰다. 이를 주제로 한 영화가 쌍화점이었다. 쌍화점은 만두를 파는 가게로 고려시대에 개성 등지에서 정착했던 아랍인들과 위구르인들이 팔던 만두가 인동초..

17. 붓뚜껍 신화 - 목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도 막상 만나면 ‘아! 이 꽃이?’ 다시 바라보는 꽃들이 있다. 목화가 그러했다. 아! 이 꽃이 문익점이 붓 뚜껑에 씨앗을 숨겨서 들여 왔다는 목화인가? 그 따스함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나무에 핀 꽃, 목화木花’라 했을까?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시기는 원의 고려 간섭기가 끝나가던 원·명교체기였다. 1297년 모친 제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원에서 돌아온 세자는 충렬왕이 총애했던 후궁 무비와 측근들을 모조리 죽인 후 양위를 받아 즉위한다. 26대 충선왕(1275~1325)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개혁하려 했지만 권문세족의 반발과 아내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8개월 만에 폐위되어 원으로 소환된다. 1307년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

16. 충충충... - 피뿌리풀

몽골에서 뿌리가 피처럼 붉다는 피뿌리풀을 만났다. 독성이 있어 양이나 말이 먹지 않기 때문에 몽골에서는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지만 제주에서는 간혹 보이는 멸종위기종이다. 한반도를 건너 뛴 몽골과 제주의 피뿌리풀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1235년 고려를 공격한 몽골은 4년간 전국을 휩쓴 후 고종의 몽골 입조를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1251년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이는 현종(992~1031) 당시 993년과 1010년에 불심으로 거란을 물리치고자 제작한 초조대장경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자 최우 무신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대몽항쟁을 이어 가기 위해 다시 새긴 대장경이다. 경판에 쓰인 나무는 재질이 균일하고 적당히 물러서 글자를 새기는데 안성맞춤인 산벚나무였다.1253년 고종이 입조하지 않자 ..

15. 권력은 칼 끝에서 - 말채나무

공원 곳곳의 흰말채나무... 겨울이면 특히 눈에 띄는 붉은 가지를 말채찍으로 사용했다는 작은키나무다. '흰'은 열매가 흰색이어서 붙은 접두사다. 우레탄처럼 낭창낭창한 가지가 말채찍에 안성맞춤이다. 18대 의종(1127~1173)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실추된 왕권 강화와 신변 보호를 위해 무신들로 친위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호위병일 뿐이었다. 문신이었던 윤관 장군의 여진 정벌 후 무신에 대한 멸시 풍조는 의종 대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기마술과 격구에 능한 의종은 성밖을 유람하며 문신들과 놀기를 즐겼다. 호위를 맡은 무신들의 피로와 불만이 쌓이면서 이고, 이의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1170년 의종은 유람지인 보현원으로 향하던 중 무신들을 위해 상품을 걸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