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화학자 홍교수의 풀꽃나무 인문학 산책 12

12. 반 고흐 : 가셰 박사의 디기탈리스

종 모양의 화려한 꽃을 피운 디기탈리스digitalis... 꽃이 장갑의 손가락을 닮아 손가락이라는 라틴어 ‘digitu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디기탈리스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고흐(1853~1890)의 천재적인 재능을 이끌어낸 꽃이었다. 화랑 직원, 책방 점원, 성직자의 길 등을 전전하던 고흐가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27세였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밀레와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묘사하면서 기교를 익혀나갔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년)’로부터 시작된 인상파의 색체에 영향을 받은 그는 사물을 분석하는 대신 사물에서 받은 감동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후 남프랑스 아를로 내려간 그는 예술가 공동체를 꿈꾸며 여러 사람을 초대했지만 응한 사람은 고갱(184..

11. 폴 세잔 : 파리를 정복한 사과

분홍색 꽃잎이 벌어지면서 드러난 하얀 꽃... ‘사과를 매일 하나씩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는 영국 속담처럼 사과는 건강한 과일이다. 흔히 아침은 금사과, 저녁은 독사과라고 하지만 대부분 과일은 밤에 지방으로 바뀌기 쉽고 섬유질과 산성이 위를 자극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껍질을 깎아낸 사과는 폴리페놀이 갈변되면서 영양소가 파괴된다. 붉은 빛깔의 탐스런 사과는 인류의 영감을 자극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그 시작은 ‘이브의 사과’였다. 이브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다가 하나님이 찾는 소리에 놀라 사과가 목에 걸려 ‘아담의 사과’라는 성대 뼈가 생겼다고 하지만, 원래 중동 지역에서 선악과는 무화과나무를 말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1511년)’에서 선악과나무도 무화과나무였다. 왜 성경에서는..

10. 클로드 모네 : 인상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한강변의 가을 하늘... 파란 하늘을 모세의 기적처럼 둘로 나누겠다는 듯이 가로 질러 크게 솟구쳐 자란 나무들이 강변을 따라 늘어 서 있다. 자연스럽게 동요 ‘흰 구름’을 떠올린다. 「미류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있네 /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 뭉게구름 흰 구름은 마음씨가 좋은가 봐 / 솔바람이 부는 대로 어디든지 흘러 간대요」 미류나무는 미국美에서 온 버드나무柳다. 음운동화로 미루나무라 부르지만 미류가 정겨운 것은 동요에서 비롯된 관성 일 것이다. 서양에서 온 버들, 양버들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미루나무는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지만, 빗자루처럼 하늘로 곧게 자란 양버들은 ‘빗자루나무’로도 불렸다. 한강변의 나무도 양버들이었다. 양버들은 인가에 많이..

09. 단테 알리기에리 : 리아트리스와 베아트리스

한여름 무더위에 찾아 나선 양평의 이재효 갤러리... 2층의 유리 통창 너머로 바라본 탁트인 바깥 풍경 사이의 독특한 조각들이 여느 미술관과는 다른 구도로 전시되어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작품 소재였을까? 입구부터 가운데에 홈을 판 돌멩이를 진주 목걸이처럼 주렁주렁 매단 작품이 강렬하다. 일상의 나무, 돌, 못, 낙엽, 공구, 철근 등의 각종 재료를 그 성질과 형태에 맞게 한없는 반복의 미학으로 탄생한 작품들이 감탄을 자아낸다.그 사이로 화려한 보라색의 리아트리스Liatris... 추위에 강해 월동이 가능하며 영어로는 타오르는 별blazing star이다.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리아트리스에서 베아트리스Beatrice를 떠올린다. 베아트리스는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대서사시 신곡神..

08. 황순원 : 소나기의 마타리

가느다란 줄기 끝에 노란 작은 꽃들이 우산처럼 펼쳐진 낯선 이름의 마타리... 마타리 하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 스파이로 명성을 날린 ‘마타 하리’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거칠다는 접두사 '막'과 갈기를 의미하는 '타리'가 합쳐친 우리말이다. 또는 꽃대가 말馬의 다리처럼 생겨서, 냄새가 지독해서 맛에 탈나게 하는 맛탈이 등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마타리는 사람이나 짐승이 가까이 가거나, 뿌리를 캐려 하면 냄새가 더 심하게 난다는 ‘똥꽃’이었다. 오죽하면 간장 구린내가 난다는 패장敗醬으로 불렸을까? '敗'는 '지다', '썩다'는 뜻을 갖는다. 그러나 마타리 꽃은 그리스 신화에서 미다스 왕의 황금손을 떠올릴 정도로 샛노랗다. 「프리기아 왕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의 양부 실레노스를 극진히 모셨다..

0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마리안네의 은행잎

보도블록 위의 나뒹구는 은행 열매... 행여 밟을까 그 사이를 조심조심 까치발로 걷는다. 은행銀杏은 은빛 가루가 덮인 살구杏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silver apricot 혹은 ginkgo다. 한자어는 잎이 오리 발을 닮아서 압각수 또는 할아버지(공)가 심으면 손자 대에 열매가 열려 공손수로도 불린다. 중생대 쥐라기에 번성했던 은행나무문의 식물은 수십 종이 있었으나 지금은 은행나무가 유일하게 남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6,500만 년 전,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다. 당시 은행나무문의 번식에 필요한 매개동물인 공룡 등의 멸종으로 인해 대부분 멸종되고 그나마 동아시아 일부에서 은행나무만 남은 것이다. 은행나무는 사람의 도움 없이 번식할 수 없어 세계자연보전연맹 지정 멸종위기종이다...

06.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샐리 가든

보라매공원 연못 주위의 수양버들... 바람에 몸을 맡긴 가느다란 줄기가 파도처럼 찰랑인다. 그 버드나무가 새로운 감성으로 다가온 것은 영화 ‘칠드런 액트The Children Act(2017년)’에서의 가요 '샐리 가든'이었다. 칠드런 액트는 미성년자의 사건에서 아동의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을 명시한 영국의 아동법이다. 「판사 피오나에게 걸려온 전화... 백혈병에 걸린 소년 애덤과 부모가 종교적 신념으로 수혈을 거부하자 병원은 법원에 제소한다. 면담을 마친 피오나가 일어서는 순간, 병상에 놓인 기타... 기타를 배운 지 4주가 되었다는 애덤이 떠듬떠듬 연주한 곡은 예이츠(1865~1939)가 아일랜드 민요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에 곡을 붙인 "Down by the Sally Gardens(샐리 가..

05.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계절의 여왕 5월... 곳곳에서 벨벳 같은 질감을 가진 붉은 장미가 피어난다. ‘담장에 기대어 자라는 식물’이라는 뜻의 장미薔薇는 원래 장미속의 찔레꽃, 해당화 등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이를 개량한 원예 품종을 총칭한다. 찔레꽃은 들장미로도 불린다.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안겨주고파 / 흰옷을 입은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주고 싶네 / 한 송이는 어떨까 왠지 외로워 보이겠지 / 한 다발은 어떨까 왠지 무거워 보일 거야 / 시린 그대 눈물 씻어 주고픈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한 여학생에게 고백했다가 채인 작사가... 여고생들의 수다가 귀에 들렸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수요일” “그래, 수요일이어서 비가 오나?” 순간 명동성당 근처에서 빨간 장미를 팔던 할머니를 떠올리..

04. 펄 벅 : 살아있는 갈대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윤수일의 명곡 '아파트(1982년)'다. 대나무와 비슷한 갈색의 풀, 갈대는 주로 생활하수를 영양분으로 자라기 때문에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기수 지역에서 잘 자란다. 미나리와 함께 대표적인 수질정화식물인 갈대는 문학과 예술의 중요한 소재였다. 가요 "갈대의 순정(1966년)"이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 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 울지를 말아라 아 갈대의 순정」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파스칼은 수상록 팡세Pensées에서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한다. 19세 때 회계사인 아버지를 위해 덧셈과 뺄셈을 하는 최초의 수동..

03. 후스 : 가재발선인장과 그게 그거

빨간 꽃을 피운 가재발선인장... 마디가 있는 납작한 잎이 가재발을 닮은 것에서 유래한다. 크리스마스 전후로 꽃이 피워 크리스마스선인장으로도 불린다. 그와 비슷한 게발선인장은 잎 가장자리가 뭉뚝하며 4월 경에 꽃을 피우는 부활절선인장이다. 브라질 원산의 이들은 나무나 바위에 뿌리를 내려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하며 모양이 그게 그거여서 구분이 쉽지 않다. 그게 그거에서 떠올린 차부뚜어... 루쉰(1881~1936)과 함께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가인 후스(1891~1965)가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쓴 “차부뚜어 선생差不多先生傳(1924년)”이라는 풍자 전기가 있다. '차부뚜어'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다는 '만만디'와 함께 중국인들이 많이 쓰는 표현으로 차이가 크지 않다는 그게 그거 혹은 대충이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