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39. 만천명월주인옹 - 복사꽃, 가래나무

flower-hong 2025. 1. 4. 14:59

도심을 가득 메운 벚꽃과 상춘객... 그렇지만 원래 꽃 중의 꽃 복사꽃이었다. 조선시대 꽃구경도 첫째는 복사꽃, 매화나 살구꽃은 그 다음이었다. 중국 전설에 활쏘기 명수인 ‘예’가 복사나무 몽둥이에 맞아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복사나무를 싫어했기 때문에 복사나무는 집안에 심지 않았고, 복숭아는 제사상에 올리지 않았지만 복사꽃은 부모님 살아실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효도화였다. 
 

복사꽃

 
1776년 노론의 끊임없는 모함과 비방을 극복하고 즉위한 정조(1752~1800)는 선포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노론은 경악했다. 그 중에 홍상범은 부친 홍술해가 공금 횡령죄로 위리안치되자, 1777년 경희궁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을 일으켰다. 홍술해는 나경언의 고변을 사주한 홍계희의 아들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오른 날개라 불리던 홍국영으로 하여금 외척 세력을 제거한다. 대리청정을 반대했던 홍인한을 파직하고 영조의 총애를 받던 고모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등이 유배되었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후궁으로 들여 보냈으나 1년 만에 요절한다. 급기야 정조의 조카 상계군을 누이의 사후 양자로 들여 세자로 삼으려 했다. 봉호도 왕실 본관인 완산(전주)과 풍산 홍씨에서 딴 완풍군으로 고쳤다. 조정과 홍국영의 집안이 하나라는 것이었다. 1780년 결국 선 넘는 행동으로 몰락한 홍국영은 유배지 강릉에서 34세에 요절한다. 
 
정조는 규장각에 서얼 출신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을 등용하고 37세 이하의 초계문신을 뽑아 친위세력으로 키워 나갔다. 수많은 기록물이 편찬되었으며 정조 역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왕의 일기인 “일성록”과 “홍재전서(1814년)” 등 100여 권의 저술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학자이기도 했다. 조선의 르네상스였다. 또한 30명으로 시작한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만팔천여 명으로 늘려가며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정조는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탁월해 백발백중의 활쏘기 실력을 갖고 있었으며, 사도세자가 쓴 병법서인 "무예신보"를 바탕으로 군사 훈련 교과서인 "무예도보통지"를 저술하기도 했다.
 
정조와 영조의 탕평책은 결이 달랐다. 영조가 각 당파의 온건파를 중용한 완론탕평과는 달리 정조는 원리원칙에 충실한 소신파들을 중용하는 준론탕평을 펼쳤다. 그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명분과 절의를 중시하던 청렴한 선비들은 정조의 탕평책에 호응했다. 이즈음 실학자들은 노장사상뿐만 아니라 서학을 분석하며 신분제와 지주제를 중시하던 농경사회의 대안을 찾아 나갔다. 노론은 반발했고 붕당 간의 갈등은 신해통공으로 나타났다.
 
조선 후기 세금을 내는 시전상인 외에 난전의 난립으로 불만이 생기자 시전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을 부여한다. 이들은 노론의 자금줄이었다. 그러나 6가지 품목을 파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신해통공으로 상업은 활기를 띄었다.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조선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유일하게 선교사 없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나라가 된다. 노론은 남인이 천주교 신자가 많은 것을 빌미로 반격에 나섰다. 마침 진산의 윤지충이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다. 남인 시파 채제공과 노론 벽파 심환지가 충돌했다. 1792년 정조는 “요즘 선비들의 기상이 점점 나빠져서 문풍이 날로 고약해지고 있다...”면서 소설과 같은 잡서 수입을 금하고, 패관잡기풍의 글을 쓰면 과거를 금지한다는 문체반정을 선포했다. 노론 소장파의 패관잡기류 글을 문제 삼아 남인과 조율하려 했던 것이다. 정조는 “열하일기(1783년)” 마저 패관잡기로 지목하고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스스로를 ‘책에 미친 바보, 간서치看書痴’라 칭했던 이덕무... 풀 중에는 산삼, 나무 중에는 마가목이라할 정도로 약효가 뛰어난 마가목을 “열하일기”는 馬家木, “홍재전서”는 馬加木,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馬檟木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적 사실이었다. ‘마가목은 채찍이나 지팡이를 만드는 데 쓰는 나무인 줄만 알고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대와 함께 책을 싸들고 농부와 야수를 찾아다니면서 그 속명을 확인하여 도경을 만들지 못함이 유감입니다.’ 그가 후배에게 쓴 편지다.
 

마가목


신분의 한계에서도 2만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은 그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됐다. ‘방의 문고리를 잡을 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 보풀이 인 낡은 책장들은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는 정조로부터 그의 시가 우아하다는 평에 감읍하여 호를 아정雅亭으로 지었으나 글이 패관소품체라는 혹평에 고민하다가 독감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도세자와는 달리 영조의 총애를 받았던 정조의 효심은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사도세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었을까?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현륭원으로 이장한 정조는 화성 건설을 시작하면서 기쁘나 슬플 때나 사도세자를 찾았다. 특히 능행에서 상언과 격쟁을 통해 백성들과 직접 소통했다. 1794년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 한지로 만든 복사꽃 삼천송이를 올렸다. 당시 화성 행차를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796년 정약용의 거중기 등이 사용된 화성이 축성되었으며 그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정조는 후반기 들어 정적 심환지와도 비밀 어찰을 통한 막후 정치로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정조는 '모든 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 노인'이라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을 호로 삼았다. 물에 비친 달은 만 개이지만 달은 하나로 왕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그의 탕평책이었다. 그는 혜경궁 홍씨가 70세가 되고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양위하고 화성행궁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자신이 아닌 순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케 하여 정통성 시비를 마무리하고 공자가 꿈꾸던 대동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1800년 정조는 괴질로 병석에 누운지 보름만에 조선 최대의 의문사라는 미스터리를 남긴 채 승하하고 말았다.

골초였던 정조... 하멜표류기에는 조선의 아이들은 4, 5세만 되면 담배를 피며, 남녀노소 담배를 피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기록한다. 정조는 온갖 식물 중 담배보다 나은 것이 없다며 담배를 주제로 질문에 답하라는 과거 문제를 내기도 했다. 스스로를 태양증이라 할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었던 정조, 사도세자의 그늘을 벗어나기에 담배만한 것이 없었던 걸까?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인 융릉과 정조와 효의왕후의 건릉이 있는 융건릉에는 다른 능과는 달리 가래나무가 많다. 씨앗의 단면이 흙을 파내는 농기구인 가래와 비슷한데서 유래하며 한자어는 추목楸木이다. 호두나무와는 사촌으로 무덤가에 많이 심었으며 조상의 묘를 찾는 것을 추행이라고도 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사도세자를 31회 찾았다. 그래서 융건릉에 가래나무가...
 

가래나무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이라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던 정조의 아킬레스건은 후사였다. 의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요절하고, 의빈 성씨마저 임신 중에 죽는다. 결국 간택된 수빈 박씨가 낳은 순조가 유일한 아들이었다. 정조는 외척인 풍산 홍씨나 경주 김씨를 철저히 견제했으나 막상 순조를 지켜줄 외척으로 영조가 왕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안동 김씨 김창집의 후손인 김조순을 끌어 들인다. 세도 정치의 판이 깔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