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38. 굴레 - 도둑놈의갈고리

flower-hong 2025. 1. 3. 10:58

파주의 서오릉... 정성왕후를 모신 홍릉의 한 쪽이 휑하니 비어있다. 원래 영조가 묻힐 자리였으나 영조의 원릉이 동구릉에 조성되면서 빈자리로 남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도둑놈의갈고리, 짚신나물 그리고 파리풀... 모두 열매에 난 낚싯바늘 모양의 갈고리로 동물의 털에 달라붙어 번식한다. 특히 선글라스 모양의 도둑놈의갈고리 열매가 앙증맞다.
 

도둑놈의갈고리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의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영조... 금수저 숙종과는 달리 그는 궁녀들의 수발을 드는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아들로 흙수저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일설에 의하면 결혼 첫날밤에 손이 곱다는 영조의 말에 정성왕후가 고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답하자 이는 숙빈 최씨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평생을 박대했다고 한다.
 

짚신나물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신임사화의 주역인 소론 강경파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하며 다시 노론이 집권한다. 그러나 당쟁의 폐해를 목격한 그는 노론의 과도한 정치보복에 제동을 걸고자 숙종 대의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노론 강경파를 몰아내는 정미환국으로 소론 온건파를 복위시켜 노론 온건파를 중심으로 탕평정치를 펴나갔다. 원래 탕평은 당파성을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벌 집단으로 변질된 이들 온건파는 각 당파의 고유한 색채를 약화시켜 훗날 세도정치로 발전하고 말았다.
 

파리풀


1728년 소론 강경파 이인좌는 남인들과 함께 경종 독살설로 난을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했다. 당시 심한 가뭄에 굶주린 이들과 노비들까지 동참했다. 나라의 절반이 역도라고 할 정도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 지방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었다. 그럼에도 영조가 등용한 소론 온건파가 반란군 진압하면서 탕평정치는 탄력을 받았다. 이때 공을 세워 영조의 신임을 받은 이가 '보검의 손잡이'라 불린 박문수였다. 경종 독살설의 역린을 건드린 주모자들은 가차없이 처형됐다. 선조 대에 정여립의 난으로 전라도가 차별을 받았다면 이번에는 반란이 가장 거셌던 영남의 선비들은 과거 응시까지 금지되었다. 
 
정성왕후를 외면했던 영조...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정성왕후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니 자식이 있을 리 없었다. 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태어난 효장세자마저 요절하고 말았다. 영조는 ‘지금 나이가 벌써 마흔이다. 보통 사람으로 말하면 쉰과 같으니 모든 방법을 다 써야 할 것이다.’라고 하자 송인명은 익모초가 후사를 얻는 데 효과가 있다 아뢴다. 
 
1735년 마침내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다. 의욕이 과했을까? 영조는 15개월 만에 세자로 책봉하고 자신이 쓴 지침서로 교육에 나섰다. 그의 교육 방식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지적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총명했던 세자는 성장하면서 차츰 영조의 기대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글공부보다는 무예에 집착한 것이다. 1749년 영조는 자신은 애초에 임금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음을 보이고 세자가 정사를 익히도록 대리청정을 명한다.
 
1755년 이인좌의 난 후 30년 가까이 유배 중이던 윤지가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규합하여 영조와 노론을 비방하는 나주괘서사건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후 25년만에 일어난 경종 독살설의 재연이었다. 탕평책을 펴며 열심히 국정을 돌본다고 자부했던 영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이의 토벌을 축하하는 과거에서 "금상은 독살범에 왕위 찬탈자다!"라는 답안지가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거병 계획까지 드러났다. 자폭 수준의 도발에 폭발한 영조는 5백여 명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대거 처형시켰다. 탕평책을 펴던 영조가 노론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13년 동안 대리청정을 했던 사도세자는 소론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공세에 따르지 않았다. 노론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론의 정치 공세와 모함에 영조와 세자는 더욱더 멀어져 갔다. 대리청정 기간 세자가 이리해도 핀잔, 저리해도 핀잔이었다. 영조의 냉대에 의대증을 비롯한 여러 정신 질환을 앓던 세자가 살인, 강간 등을 저질렀다. 비오는 날, 그는 칼을 뽑아 들고 영조의 침전으로 향하기도 했다. 
 
1762년 노론이 세자의 관서행이 변란을 도모한 것이라고 영조에게 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경언을 사주해 세자의 열 가지 비행과 역모를 고변한다. 노론의 승부수였다. 결정적으로 영빈 이씨마저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다. 마침내 영조는 자결을 거부하는 세자를 뒤주에 가둔다. 조선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임오화변이었다.
 
"내가 13일의 일을 좋아서 하였으랴.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 오호라.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영조가 쓴 ‘사도 세자 묘지문’의 일부다. 사도는 사思, 슬퍼할 도悼로 영조가 아들을 죽음을 생각하며 애도한다는 의미 같지만 시법상 사도는 이전의 잘못을 후회하고 중년이 되기 전에 죽었다는 뜻이다.

5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의 장수 비결은 채식과 현미·잡곡 등 거친 음식을 소식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는 식습관과 고추장이었다. 1748년 심한 현기증과 입안 염증으로 밥을 먹지 못해 생명이 위독할 때 고추장으로 입맛을 찾은 영조는 기력을 회복한다. 고추장을 올린 사람은 사도세자였다. 또한 영조는 맥문동을 즐겼다. 뿌리가 보리를 닮았다는 ‘맥문’과 겨울을 이겨낸다는 맥문동은 화단에 흔한 지피식물로 승정원일기에 1,000번 이상 나온다.
 

맥문동


영조는 탕평책과 백성을 위해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실시하고 신문고를 부활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운 애민군주였다. 또한 양반가의 부녀자들의 사치를 금하기 위해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했으며 재위기간 내내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1776년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지 3개월 후 승하한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오래 중전의 자리에 있었던 정성왕후... 영조의 막장 드라마에 가려졌지만 그녀 역시 한을 품은 여인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1805년)”에서 정성왕후가 숨을 거두기 전에 검은 피를 한 요강 토한 것은 가슴 속 울분을 쏟아낸 것이라고 기록한다. 그렇지만 정성왕후는 후궁과 그 자식들을 친모처럼 보살폈다. 사도세자가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정성왕후와 그의 버팀목이었던 할머니 인원왕후의 연이은 죽음이었다. 정성왕후는 우여곡절 끝에 사도세자를 양자로 들여 정조로 대를 이었다. 그 홍릉에서 소리 없이 달라붙는 도둑놈의갈고리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