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44

34. 일장춘몽, 북벌 - 올벚나무

북벌을 목표로 삼았던 효종(1619~1659)은 서울 우이동에 산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게 하는 등 벚나무 심기를 장려했다. 벚나무 껍질, 화피는 화살을 쏠 때 손이 아프지 않도록 활에 감는 중요한 군수 물자였기 때문이다(혹은 자작나무 껍질이라고도 한다). 당시 벚꽃은 ‘북벌꽃’이었다. 1649년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시험대에 올랐다.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 후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며 정계로 진출한 산림이 인조의 최측근으로 봉림대군을 지지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김자점을 탄핵한 것이다. 이는 효종의 정통성과도 연관된 것이었다. 효종은 김자점을 파직했지만 세자빈 강씨 사건의 재조사는 거부했다. 그에게 형수 강빈은 자신의 정통성을 흔드는 금기어였다. 왕권에 대한 정통성이 약했던 효종이 명에 대한 대의명분을 ..

33. 경징아! 경징아! - 경징이풀

47일 간의 병자호란(1636~1637)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2017년)... 최명길과 김상헌,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조(1595~1649)보다 눈길을 끈 것은 송파강이 풀리면 핀다는 민들레의 자막 dandelion이었다. ‘lion?’ dandelion은 민들레 잎이 사자 이빨처럼 들쭉날쭉하다는 프랑스어 dent-de-lion에서 유래한다. 반면에 민들레는 문 둘레에 피는 꽃이라는 우리말이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였음에도 불안했다. 그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낳은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터가 왕기가 서린 곳이라는 말에 집안을 풍비박산 내버렸다. 인조의 동생은 역모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정원군은 홧병으로 죽는다. 능양군은 서인과 손잡고 친명배금을 내세워 반정을 일으켜 16대 인조(1595~16..

32. 빛의 바다 - 탱자나무

가지 사이를 날카로운 가시로 빈틈 없이 빽빽하게 채운 탱자나무... 이름은 탱글탱글한 열매에서 유래한다. 탱자나무는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은 죄인들에게는 치가 떨리는 나무였다. 집 둘레에 겹겹히 심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담을 쌓는 나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광해군(1575~1641)도 있었다. 선조는 의인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다만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얻었다. 공빈 김씨가 일찍 죽자 의인왕후는 그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대하며 후견인을 자처했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했고, 선조가 총애했던 인빈 김씨의 의안군과 신성군은 요절해 경쟁 상대가 없었다. 선조의 데자뷰일까?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가 세상에서 가장 으뜸인 반찬을 묻자 광해군은 온갖 맛을 이루는 소금이라 답했다...

31. 무능의 아이콘 - 삼나무

제주의 돌담 위로 쑥 솟은 비릿한 향의 쑥대낭... 삼나무의 제주 사투리로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는 나무라는 뜻이다. 일본 원산의 삼나무는 주로 방풍을 위해 감귤밭 주위에 심었던 나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안택선은 재질이 무르고 가공이 쉬운 삼나무로, 조선의 판옥선은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었다. 그 차이는 이순신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략전술과 함께 전쟁의 물줄기를 조선으로 틀었다. 강판권 교수는 “조선을 구한 신목, 소나무(2013년)”에서 임진왜란을 소나무와 삼나무 전쟁으로 규정했다. 후사가 없던 명종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인 이복동생 덕흥대원군의 세 조카들 중에서 하성군을 총애했다. 다른 후궁들과는 달리 창빈 안씨는 문정왕후와 사이가 좋았다. 명종이 조카들에게 익선관을 써보라고 하자 하성군은 ..

30. 엄마의 그늘 - 이질풀, 익모초

진한 분홍빛에 앙증맞은 꽃... 이질에 효과가 있다는 이질풀이다. 복통과 함께 설사에 피와 점액이 섞여 나오는 이질은 치명적인 전근대적 질병이었다. 환자의 대변에 있는 ‘시겔라균’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식수 등에 의해 퍼지며 한 아이만 피똥을 싸도 금방 온 동네에 퍼지는 전염병이다. 1509년 서장자인 복성군을 낳은 경빈 박씨는 중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1515년 장경왕후가 세자를 낳자마자 산후병으로 사망한 후에도 신하들의 반대로 계비로 책봉 받지 못했다. 1517년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대윤)의 천거로 계비가 된 문정왕후는 딸만 셋을 낳는다. 어느 날, 예불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소나기를 만난 문정왕후는 아들만 아홉인 선비의 집에서 비를 피한다. 문정왕후가 비법을 묻자 그는 봄, 여름, 가을에는 익모..

29. 어찌할꼬? - 뽕나무

인문관 옆 빈터에 어지러이 떨어진 검붉은 열매... 오디(mulberry)다. 뽕나무는 오디를 먹으면 소화가 잘되고 방귀가 뽕뽕 나와서, 오디는 열매가 오돌토돌하다는 ‘오들개’에서 유래한다. 뽕밭이 어느 새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뽕나무는 어디서든 쑥쑥 잘 자란다. 뽕잎은 양잠에 필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대농가는 300그루, 중농가는 200그루, 소농가는 100그루를 심게 했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뽕밭’은 물레방앗간과 쌍벽을 이루는 로맨스 카페이기도 했다. 1506년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1488~1544)은 반정군이 자신의 집을 에워싸자 올 것이 왔다는 두려움에 자결하려 했다. 단경왕후 신씨는 군사의 말머리가 궁궐을 향한다면 호위하러 왔을 것이라며 말렸다. 그러나 단경왕후..

28. 폭주 기관차 - 영산홍

활짝 핀 꽃이 온 산을 붉게 비춘다는 영산홍映山紅... 그 붉은 빛이 얼마나 예뻤으면 “양화소록”을 강희안이 일본에서 조공으로 바친 왜철쭉(영산홍)을 서시, 자색에 겹꽃인 철쭉을 모모嫫母에 비유했을까? 서시는 중국의 4대 미인, 모모는 중국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황제黃帝의 부인으로 용모는 추했으나 덕행으로 황제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다. 사슴과 원숭이, 백조 등을 궁궐에서 기를 정도로 동물덕후였지만 "짐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올리지 말라.”는 전교를 내렸던 성종과 달리 연산군(1476~1506)의 꽃에 대한 취미는 병적이었다. 1505년 그는 영산홍 일만 그루를 후원에 심고 숫자까지 보고하게 했다. 일설에는 일본에서 들여오던 왜철쭉이 중종반정으로 민가에 퍼지면서 연산홍燕山紅으로 불렸다고도 한다..

27. 주요순 야걸주 - 소나무

1484년 성종(1457~1495)은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어머니 소혜왕후(인수대비)를 위한 창경궁을 지었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린 창경궁은 경복궁 중건 이전까지 정사를 보던 궁궐이었다. 창경궁에 가장 많은 나무는 소나무와 단풍나무다. 소나무는 진시황이 태산에서 제를 지내고 내려올 때 그 아래에서 비를 피하면서 목공木公의 작위를 받은 것에서 ‘송松’이 되었다. 속리산 정이품송도 법주사로 행차하던 세조가 임금의 가마인 연輦이 걸린다고 하자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품계를 받았다는 소나무다. 계유정난 후 조선은 한명회 천하였다. 그나마 그를 견제하던 예종이 요절하자 한명회는 재기했다. 실록에 실린 36,000여 회의 경연 중 25년 간 세종보다도 많은 9,229회나 참여했던 성종은 정희왕후..

26. 남아이십 - 메타세쿼이아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남이섬... 길 양쪽에 메타세쿼이아가 도열해 있다. 메타세쿼이아는 ‘나중에’라는 그리스어 ‘메타’와 ‘세쿼이아’의 합성어로 세쿼이아(미국삼나무)를 닮은 나무다. 화석이 발견된 후 중국의 자생지가 알려지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부터 가로수로 많이 식재되었다. 소나무 같은 잎이 깃털처럼 떨어진다는 낙우송落羽松과 비슷하지만 낙우송의 잎은 어긋나기다. 또한 습지에 잘 자라는 미국 원산의 낙우송은 원뿔형의 공기뿌리가 땅위로 혹처럼 솟아난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사냥터에도 정희왕후를 대동할 정도로 애처가였다. 후궁은 단 한명이었으며 자식도 정희왕후 사이에서 의경세자와 예종뿐이었다. 요절한 의경세자에게는 네 살의 월산대군과 생후 1개월의 자을산군이 있었다. 종..

25. 사나운 꿈자리 - 모과나무

나무에 핀 연꽃(목련), 나무에 열린 딸기(산딸나무)처럼 나무에 열린 노란 참외라는 목과木瓜에서 유래한 모과나무... 모과는 울퉁불퉁한 열매, 기품 있는 연분홍 꽃, 진한 향에 감춰진 신맛으로 우리를 세 번 놀래키는 나무다. 군복의 카무플라주camouflage처럼 얼룩덜룩한 수피가 인상적이다. 세조(1418~1468)는 단종 복위 사건을 계기로 집현전을 폐지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며 왕권을 다져나갔다. 6조 직계제를 환원시키고, 정통성의 부족으로 인해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 경연을 없애고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했다. 호패법을 실시했으며 신진 관리들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자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권을 주는 직전법을 실시했다. 세조는 조선의 근간이 된 경국대전의 편찬을 착수하고 한글 서적을 널리 보급하였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