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42. 강화로 보내주오 - 순무

flower-hong 2025. 1. 11. 14:40

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강화순무... 우리에게 꽁보리밥에 염장국이 있었다면 서양에는 호밀 빵에 순무 수프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영국의 해상 봉쇄와 러시아의 곡물 수출 금지로 인해 '순무의 겨울’이라는 극심한 식량난을 겪기도 했다. 순무는 제갈채로도 불렸다. 재배 기간이 짧고 날로 먹을 수 있어 제갈량이 전쟁 중에 비상식량으로 심은 것에서 유래한다. 콜라비는 양배추라는 독일어 '콜(kohl)'과 순무라는 '라비(rabi)'의 합성어로 양배추순무다.
 

콜라비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안동 김씨는 정조의 이복형제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의 후손을 찾아 나섰다. 영조 당시 시전 상인들에게 큰 빚을 져 물의를 일으킨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로 유배됐으나 은신군은 풍토병으로 죽고 은전군은 정조를 암살하려는 존현각 침투 사건에 휘말려 사사되었다.

1776년 유배에서 풀린 은언군에게는 상계군, 풍계군, 전계대원군이 있었다. 상계군은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로 들여 정조의 후계자로 추대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어 은언군과 강화도로 유배된 후 극심한 스트레스로 음독자살한다. 정조의 비호로 목숨을 부지한 은언군도 그의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1844년 전계대원군의 첫째 회평군은 역모에 휘말려 죽고, 이원범은 형과 강화에서 살고 있었다.

결국 강화도령 이원범이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조선 제 25대 철종(1831~1863)으로 즉위한다. 당시 철종은 헌종보다 항렬이 높은 삼촌뻘이었지만 사도세자의 후손 중에는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 후보로 흥선대원군도 있었지만 그 역시 철종과 항렬이 같았고 나이가 많아 바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동 김씨의 선택은 허수아비 철종이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행렬에 놀란 철종은 도망치기까지 했다. 안동 김씨는 철종 가문의 역모에 관련된 기록을 모조리 파기했다.
 
세도정치기의 조선은 안동 김씨의 나라였다. 야사에 의하면 최고 권력자 김좌근에게는 나주 출신의 애첩이 있었다. 그녀의 별명은 나주 합하, 나합이었다. 합하는 삼정승의 존칭이었다. 그녀의 눈에 든 북청물장수가 북청군수가 될 정도였다. 어느 날 김좌근이 나합의 뜻을 묻자 그녀는 “남자들이 여자를 희롱할 때 합(蛤, 조개)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를 ‘나주에서 온 합’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며 둘러 댔다. 

철종은 안동 김씨 가문인 김문근의 딸을 철인왕후를 맞았고 안동 김씨의 매관매직과 삼정의 문란을 극에 달한다. 16~59세의 양인들에게 걷는 군포를 어린아이에게 징수하는 황구첨정, 죽은 사람에게도 백골징포가 성행했다. 게다가 빌리지도 않은 환곡을 징수했다. 1862년 마침내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임술민란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철종은 이를 지렛대 삼아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안동 김씨의 비변사에 의해 좌초되었다. 

개혁이 실패하자 백성들은 말세론에 기대기 시작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최제우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영호남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동학의 교리는 '한울님을 모시니 장생하며 영원무궁토록 만사를 알게 한다'는 단순한 주문이 거의 전부였다. 1864년 최제우가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처형된 후 처형된 후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 3대 교주 손병희로 이어진다. '좌'는 왼쪽이란 뜻과 그릇되다는 의미를 갖는다. 
 
철종은 자식 복이 없었다. 철인왕후와 7년 만에 낳은 원자가 6개월 만에 요절하고 7명의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 넷과 딸 여섯마저 모두 단명하고 말았다. 그나마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와 결혼한 영혜옹주가 14세까지 살았다. 하룻밤 새 왕이 되버린 철종은 의욕을 상실한 채 시름시름 앓다가 33세에 승하하고 말았다. 일설에는 암울한 현실에 주색에 빠졌다고도 하지만 즉위 초부터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병을 달고 살았다.

철종은 강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에게는 산해진미보다 쌉쌀하고 겨자 맛 나는 강화순무가 더 그리웠을 것이다. 지금의 강화순무는 1884년 통상조약을 체결한 영국에서 들여온 보라색 순무와 강화의 흰색 순무의 교잡종이다. 철종 사후 다시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은 조대비라 불리는 신정왕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