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을 목표로 삼았던 효종(1619~1659)은 서울 우이동에 산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게 하는 등 벚나무 심기를 장려했다. 벚나무 껍질, 화피는 화살을 쏠 때 손이 아프지 않도록 활에 감는 중요한 군수 물자였기 때문이다(혹은 자작나무 껍질이라고도 한다). 당시 벚꽃은 ‘북벌꽃’이었다. 1649년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시험대에 올랐다.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 후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며 정계로 진출한 산림이 인조의 최측근으로 봉림대군을 지지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김자점을 탄핵한 것이다. 이는 효종의 정통성과도 연관된 것이었다. 효종은 김자점을 파직했지만 세자빈 강씨 사건의 재조사는 거부했다. 그에게 형수 강빈은 자신의 정통성을 흔드는 금기어였다. 왕권에 대한 정통성이 약했던 효종이 명에 대한 대의명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