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20. 이런들 저런들 - 칡, 등나무

flower-hong 2024. 10. 31. 07:55

그 누구보다도 조선 건국에 진심이었던 야심가 태종 이방원... 그는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에게 최후 통첩을 날린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대한 정몽주의 답가는 ‘단심가丹心歌’였다. 이 시조로 정몽주는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받지만 실상은 그도 우왕과 창왕을 폐하는 데 이성계와 뜻을 같이 했을 정도로 권력지향적이었다. 정몽주를 척살한 이방원은 태조의 눈 밖에 났으나 조선 개국의 걸림돌을 제거한 일등공신이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드렁은 논밭 가장자리에 작게 쌓은 둑이나 언덕으로 드렁 칡은 그 곳을 따라 뻗은 칡덩굴이다. 한자어 ‘갈등葛藤’은 덩굴식물인 칡(갈)과 등나무 줄기가 서로 엉켜 자랄 때 칡은 반시계, 등나무는 시계 방향으로 감고 오르기 때문에 안쪽은 눌려서 죽는 것에서 유래한다. 꽃도 자주색 칡 꽃은 하늘을 향해, 화려한 연보라색 등나무 꽃은 아래로 곱게 늘어뜨린다. 그러나 선비들은 관상용으로 많이 심었던 등나무를 다른 사람에 빌붙는 소인배 같다 하여 멀리했다. 
 


58세에 즉위한 태조의 고민은 후계자였다. 그에게는 건국 전에 세상을 떠난 신의왕후 소생의 여섯 왕자와 신덕왕후의 방번과 방석이 있었다. 고려 말 신흥 무인이었던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맞이한 것은 든든한 외척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보다 20살 어린 신덕왕후는 고비마다 그의 결단을 도왔다.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제시한 정도전은 버거운 상대인 방원보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있는 어린 방석을 지지했다. 태조의 선택은 장차 피바람을 불고 올 방석이었다. 정도전은 군 통솔 기관인 의흥삼군부를 바탕으로 병권 및 중앙 집권화와 함께 요동정벌을 추진한다. 1395년 명나라의 주원장은 조선이 보낸 표전문에 불경한 문구가 있다는 핑계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하면서 조선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명나라 건국 초기로 몽골제국의 잔존세력인 북원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종친들이 소유한 사병을 혁파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던 정도전은 공민왕 사후 원의 사신 접대를 거부해 권문세족의 탄핵으로 귀양을 가 있었다. 이후 여기저기 떠돌던 그는 동북면병마사 이성계를 만나 위화도 회군 후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는 듯했으나, 정몽주에 의해 다시 유배되고 그가 피살된 후 개경으로 돌아온 개혁가였다. 1394년 태조의 뜻을 받든 정도전은 한양 천도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가 꿈꾸던 세상은 유교 사상과 신권 중심의 세상이었다. 

등나무

 
그러나 신덕왕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396년 방원은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방석을 제거하고 둘째 형 방과를 즉위시켰고 명과의 관계도 복원되었다. 1399년 정종(1357~1419)은 민심이 흉흉하자 수도를 개경으로 다시 옮기고 격구를 즐기는 등 정치에 뜻이 없음을 보여 방원을 안심시켰다. 정안왕후와 금슬은 좋았던 정종은 8명의 첩에게서 15남 8녀를 두었다. 잠깐 권력의 맛에 취했을까? 1398년 정종은 서장자 불노를 원자로 삼는다. 이숙번 등은 속히 방원을 세자로 봉하라고 압박한다. 이에 정종은 불노는 “내 자식이 아니다" 선언하고 아들들을 모두 출가시킨다.

1400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이등공신 책봉에 불만이었던 박포의 충동질로 넷째 형 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그는 정종의 양위로 3대 태종(1367~1422)으로 즉위한다. 태종이 부러워할 정도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정종은 63세로 천수를 누렸다.
 
미운 털 박힌 태종이 즉위하자 낙담한 태조는 함경도로 향했다. 야사에는 태조가 귀경을 요청하러 온 차사마다 죽여 한 번 가면 감감 무소식이라는 함흥차사도 생겨 났지만 실제로 이성계에게 희생된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흘러도 태조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고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 갔다.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태조의 묵인 하에 반란군은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결말은 허무했다. 조사의 군대에 사로잡힌 관군이 4만의 관군을 어떻게 감당하겠냐는 말에 겁 먹은 탈영병이 속출하면서 순식간에 분열되고 말았다.
 
태종은 왕권 강화와 조선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고려 후기 신권을 대변하던 도평의사사 대신 설치한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6조 직계제를 실시한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그러나 보복은 철저했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신덕왕후의 정릉을 지금의 덕수궁 일대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으로 옮긴 후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없애 버렸다. 심지어 홍수로 무너진 청계천 광통교를 정릉의 병풍석으로 복구할 정도였다.
 

갈등


칡과 등나무의 갈등은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적 순환이다. 정반합은 ‘正’과 ‘反’의 갈등과 조정을 통해 더 나은 ‘合’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헤겔의 역사관에서 발전의 핵심요소는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특히 여말선초는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간의 갈등의 시기였다. 위화도 회군, 태종과 정몽주, 왕자의 난... 그러나 만수산 드렁칡을 읊었던 태종의 선택은 권력의 정점을 향한 무자비한 숙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