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24. 비운의 소년 군주 - 협죽도

flower-hong 2024. 11. 17. 12:35

기다란 잎과 줄기가 대나무를 닮은 협죽도夾竹桃... 제주에서는 가로수로도 심었으며 천남성, 투구꽃, 비상 등과 함께 사약의 재료로 쓰였다. 하지만 사약은 재료, 제조법 그리고 사람에 따라 약효가 다르기 때문에 사극처럼 마시자마자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천남성은 독성을 제거한 후 이독공독以毒攻毒의 약재로도 쓰였다. 이로 인해 사약을 마신 후 고열과 구토, 어지러움 등으로 죽도록 고생하다가 죽기도 했다.
 

협죽도



1452년 단종(1441~1457)이 즉위하자 고명대신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는 황표정사를 실시했다. 이는 관리를 임명할 때 추천된 3인 중 한 명의 이름에 고명대신들이 황표로 표시하면 단종이 추인할 수 있도록 문종이 만든 제도였다. 고명대신들은 안평대군과 함께 수양대군을 경계했다. 학문과 예술, 시서화에 뛰어났던 안평대군도 수양대군 못지 않은 야심가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홍달손 등과 거사를 준비하면서 명에 단종의 즉위를 알리는 고명사은사를 자청하기도 했다. 종친으로서 충성을 보여 경계심을 풀기 위한 것이었다.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한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는 방심했다. 모든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안평대군을 제외한 종친들을 철저히 배제했으며 수양대군을 자신의 상대로 여기지 않았다. 반면에 수양대군은 김종서라는 산을 넘기 위해 인재들을 포섭하고 종친들과 집현전 신하들을 끌어들여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1453년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을 찾았다. 그가 건넨 편지를 달빛에 비추는 순간 김종서는 철퇴를 맞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살생부에 적힌 핵심인물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제거했다. 계유정난이었다. 양대군은 정권을 장악했고 안평대군도 사사되었다. 김종서의 부하였던 함경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으나 부하들의 변절로 피살되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의 유모였던 혜빈 양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단종의 혼인을 서둘렀다. 단종은 “3년 상중에 결혼할 수 없다”고 버텼지만 종묘사직의 명분을 내세운 수양대군은 문종의 국상도 끝내 버렸다. 1455년 단종은 금성대군 등을 유배 보내라는 압박에 “내가 나이가 어리니 간사한 무리들이 발동하는구나.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한다.”고 선언했다. 마침내 수양대군은 제7대 세조(1417~1468)로 즉위했다.
 
1456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난다. 단종은 성삼문에게 칼을 하사했다. 암묵적 동의였다. 그러나 거사가 연기되자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고하면서 계획은 발각되고 말았다. 세조는 국문하며 회유했으나 성삼문은 “상왕이 계신데 나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라 반발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사육신과 달리 노산군의 처형을 주장한 신숙주는 오늘날 변절자의 대명사로 남았다. 쉽게 상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로 부르는 이유다. 1457년 금성대군은 유배지에서 순흥부사와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으나 관노의 밀고로 사사되었다.
 
단종의 죽음에는 여러 기록과 야사가 전한다. “세조실록”은 금성대군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에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기록한다. 연려실기술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뜰에 엎드렸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하문했으나 대답을 못했다. 이에 모시던 통인 하나가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겨 즉사했다고 기록한다. 왕방연은 돌아가던 길에 청령포에서 ‘단장가’로 그 비통한 심정을 남겼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 내 마음 둘 데 없어 말 내려 냇가에 앉았으니 /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노매라」
 
사약을 받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드라마에서 장희빈이 사약을 발로 차버리자 분노한 숙종이 강제로 사약을 한 사발을 먹인 뒤에 "한 사발 더 부으라!"라고 명하는 장면은 지금도 회자된다. 반면에 조광조는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처럼 하였다는 절명시를 남기고 순순히 사약을 받았다.
 

천남성


사약은 죽을 ‘사死’가 아닌 임금이 하사下賜한 약이었다. 신체발부身體髮膚 수지부모受之父母 불감훼상不敢毁傷 효지시야孝之始也...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유교 사상에 따라 몸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도록 임금이 내리는 마지막 배려인 것이다. 사약을 내린 세조와 받는 단종... 그들은 더 이상 삼촌과 조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