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분홍빛에 앙증맞은 꽃... 이질에 효과가 있다는 이질풀이다. 복통과 함께 설사에 피와 점액이 섞여 나오는 이질은 치명적인 전근대적 질병이었다. 환자의 대변에 있는 ‘시겔라균’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식수 등에 의해 퍼지며 한 아이만 피똥을 싸도 금방 온 동네에 퍼지는 전염병이다.

1509년 서장자인 복성군을 낳은 경빈 박씨는 중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1515년 장경왕후가 세자를 낳자마자 산후병으로 사망한 후에도 신하들의 반대로 계비로 책봉 받지 못했다. 1517년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대윤)의 천거로 계비가 된 문정왕후는 딸만 셋을 낳는다.
어느 날, 예불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소나기를 만난 문정왕후는 아들만 아홉인 선비의 집에서 비를 피한다. 문정왕후가 비법을 묻자 그는 봄, 여름, 가을에는 익모초 즙을, 겨울에는 차로 마셨다고 아뢴다. “동의보감(1613년)”에 익모초는 ‘회임 전이나 산후 부인의 모든 병을 구며 회임과 월경에 효과가 있다.’는 풀이었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세자를 저주하는 ‘작서의 변’에 이어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든 종이에 세자와 임금을 저주하는 ‘가작인두의 변’에 휘말려 사사되었다. 당시 세자가 사망하고 문정왕후가 소생이 없을 경우 복성군이 왕이 될 수도 있었다. 1534년 마침내 문정왕후는 결혼한지 17년 만에 경원대군을 낳는다. 1537년 김안로는 윤임과 손잡고 문정왕후의 폐위를 시도하다 사사됐다.

1544년 인종(1515~1545)의 즉위로 대윤이 기선을 잡았다. 인종은 계모인 문정왕후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깍듯이 대한 효자였다. 그는 중종의 장례에서 머리를 풀고 맨발로 뜰 아래 엎드려 엿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고, 다섯 달 동안 곡을 했다. 급기야 인종은 8개월 만에 승하한다. 어렸을 때부터 중종의 질문에 막힘이 없었던 인종은 장차 요순임금이 될 재목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조선 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게 끝나고 말았다.
인종의 사인에 여러 소문들이 돌았다. 1543년 동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자 세자는 문정왕후의 뜻으로 줄 알고 “차라리 조용히 타 죽겠다”고 했다. 또한 문정왕후가 “이제 홀로 된 첩과 약한 아들이 어떻게 몸을 보전하겠느냐”고 괴롭히자 인종은 햇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에 맨 땅에 엎드려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달래기도 했다. 장례를 치르며 몸이 만신창이가 된 인종을 사지로 내몬 것이다. 이에 이질에 시달린 인종에게 상극인 닭죽을 바쳤다는 이야기와 문정왕후가 난생 처음 살갑게 건넨 떡을 덥석 받아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종은 중종의 상중에 거의 음식을 손에 대지 않을 정도의 거식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였다. 신하들이 문정왕후에게 인종이 제발 고기를 들 수 있게 말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1545년 명종(1534~1567)이 12세에 즉위하자 조선 최고의 치맛바람을 일으키면서 수렴청정을 시작한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형(소윤)은 윤임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을사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숙청한다. 1547년 여주女主가 나라를 망친다는 ‘양재역 벽서’ 사건을 빌미로 남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노비로 정경부인에 오른 그의 첩 정난정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정난정은 시전을 장악해 뇌물을 받고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등 치부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553년 명종이 친정하지만 문정왕후는 여전히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그녀는 정난정이 소개한 승려 보우를 앞세워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선·교 양종을 다시 세우고, 승과와 도첩제를 부활시키는 등 불교 중흥을 꾀했다. 이때 발탁된 이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였다.
명종의 시대는 국정 혼란으로 도적 임꺽정이 판치던 시대였다. 중종 때 출사한 퇴계 이황은 칼 찬 선비라는 남명 조식에게 임금께서 덕으로 벼슬을 내리시니 출사하라 편지한다. 남명은 눈병으로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지 여러 해인데, 밝은 눈을 가진 공께서 발운산(안약)으로 눈을 밝게 열어 달라 답한다. 나라가 혼란한데도 임금의 덕을 말하니 발운산으로 눈앞의 구름을 걷어 달라는 것이었다. 퇴계는 “저도 당귀를 구하나 얻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발운산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답한다. 자신도 낙향하고 싶지만 현실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약방 특유의 향을 내는 당귀當歸는 당연히 돌아간다는 한자어였다. 사실 조선 시대 대표학자로 추앙받은 퇴계는 사림에 대한 박해를 피해 사직을 밥먹듯이 했지만 어떤 형태로든 정계와 끈을 놓지 않았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세상이 변했다. 예정된 권력의 말로가 언제나 그러하듯 윤원형과 정난정은 자결했다. 보우는 제주로 유배되어 죽는다. 1567년 병약했던 명종이 34세로 승하한다. 22년이나 왕위에 있었지만 문정왕후의 그늘에 가려진 그는 외로운 임금이었다. 그가 외척을 내치려 하자 문정왕후는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다면 상에게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냐며 꾸짖었다. 명종은 때로는 목 놓아 울었으며 울화와 심장이 과열되는 심열증을 얻었다. 그의 사인도 과도한 스트레스와 이질이었다.
명종에게 아들은 13세에 요절한 순회세자뿐이었다. 1567년 선조(1552~1608)가 즉위했다. 중종의 9남 서자 덕흥대원군의 3남이었던 선조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방계였다. 그러나 중종의 손자들 중 적자는 덕흥대원군의 아들 3형제와 풍산군뿐이었으며 그 중 복성군의 양자로 들어간 하성군이 종법상 서열 1위였다. 한편 4대 사화로 몰락한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통해서 지방 양반들과 백성들 속에 세력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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