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사이를 날카로운 가시로 빈틈 없이 빽빽하게 채운 탱자나무... 이름은 탱글탱글한 열매에서 유래한다. 탱자나무는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은 죄인들에게는 치가 떨리는 나무였다. 집 둘레에 겹겹히 심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담을 쌓는 나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광해군(1575~1641)도 있었다.

선조는 의인왕후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다만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얻었다. 공빈 김씨가 일찍 죽자 의인왕후는 그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대하며 후견인을 자처했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했고, 선조가 총애했던 인빈 김씨의 의안군과 신성군은 요절해 경쟁 상대가 없었다. 선조의 데자뷰일까?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선조가 세상에서 가장 으뜸인 반찬을 묻자 광해군은 온갖 맛을 이루는 소금이라 답했다. 이어서 가장 아쉬운 것은 생모가 일찍 죽은 것이며, 여러 선물 중에는 먹과 붓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정통성 컴플렉스로 적자를 원했던 선조는 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모든 실권을 넘기고 명으로 망명하려 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며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백성을 위로하며 민심을 얻었다. 그 와중에 몇 차례 반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광해군과 의병장들을 의심했다. 1600년 의인왕후가 죽고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가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그를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어렸고 광해군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폐할 수는 없었다. 임진왜란 후 주도권을 잡은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영창대군의 소북파로 나뉜다.
1608년 선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광해군이 즉위한다. 영창대군은 불과 세 살이었다. 광해군은 토지에 따라 공물을 쌀, 베, 돈으로 내는 대동법을 실시,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공납 부담을 덜었다. 공납은 각 지역의 특산물로 세금을 내는 것이었지만, 이를 대납하는 사람들의 폭리로 인해 실제 내야할 세금보다 훨씬 많았다. 1610년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전래된 담배가 약재로 인식되면서 널리 퍼진 것도 이 때였다. 대신들은 임금 앞에서도 담배를 피워댔다. 그러나 광해군이 담배 연기를 싫어하자 차츰 후미진 곳에서 피우면서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예절이 생겨나기도 했다.
1613년 문경새재에서 강변칠우로 불리는 사대부 서자들의 ‘은상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남인에게 밀려났으나 전란중에 광해군과 활약한 의병장들 배출하며 정계의 주도권을 잡은 대북파는 그들에게 은상 강도는 거사 자금 마련을 위한 것이었으며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이 배후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계축옥사였다. 점점 성장하는 영창대군은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1614년 인목대비는 폐모되어 창덕궁에 유폐되고, 이이첨의 지시를 받은 강화부사는 영창대군을 방 안에 가두어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대의와 명분, 효를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일어난 형 임해군의 사사뿐만 아니라 패륜적인 폐모살제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했다. 더 나아가 그는 한양의 지기가 쇠했다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천도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1617년 경희궁과 인경궁 창건에 나섰다. 광해군은 남귤북지南橘北枳처럼 전쟁 중에 귤이었으나 왕이 된 후 점차 탱자로 변해 갔다. 빗발치는 반대 상소에도 막무가내였다.
1619년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이 세력을 키운 여진족은 후금을 세워 명에 선전포고했다. 명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원군을 요청했다. 왜국의 재침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자 광해군은 먼저 조선을 치겠다고 명의 협박에 강홍립을 도원수로 1만 3,000명을 파병한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대패했고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한다. 이는 상황에 따라 대처하라는 밀명에 따른 것이었지만 조선군은 8,000명 이상이 죽었다.
폐모살제, 무리한 궁궐 건설로 인한 민생피폐, 명과의 전통 사대를 버렸다는 일련의 사건은 대북파에 눌려 있던 서인에게 반정의 명분을 주었다. 이귀와 김자점 등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있었으나, 뇌물로 매수된 김개시는 김자점이 역모를 일으킬 힘이 없다며 변호했다. 광해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이이첨을 의심했지만, 주동자는 이귀와 김자점이었다. 눈치 빠른 김개시는 정치적으로 고립된 광해군 대신 반정군을 선택했으나 그녀는 곧바로 처형당했다. 광해군과 김개시에 대한 인목대비의 증오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강화에서 15년간 유배 후 제주에 위치안치됐다. 나인에게 영감이라는 놀림을 받았던 그는 67세까지 천수를 다했다.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삼촌 광해군을 사사할 수 없었다. 빛의 바다 광해光海... 담증이 있어 모과를 장복했던 그는 충청도에서 한 개도 올려보내지 않자 속히 파발을 띄우라고 독촉했었다. 그가 목말라했던 모과를 죄인의 신분으로 어떻게 했을까? 혹시 탱자를... 탱자는 담을 쌓기도 하지만 담을 뚫는데도 효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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