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34. 일장춘몽, 북벌 - 올벚나무

flower-hong 2024. 12. 21. 00:16

북벌을 목표로 삼았던 효종(1619~1659)은 서울 우이동에 산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게 하는 등 벚나무 심기를 장려했다. 벚나무 껍질, 화피는 화살을 쏠 때 손이 아프지 않도록 활에 감는 중요한 군수 물자였기 때문이다(혹은 자작나무 껍질이라고도 한다). 당시 벚꽃은 ‘북벌꽃’이었다.
 

수양벚나무


1649년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시험대에 올랐다.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 후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며 정계로 진출한 산림이 인조의 최측근으로 봉림대군을 지지하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김자점을 탄핵한 것이다. 이는 효종의 정통성과도 연관된 것이었다. 효종은 김자점을 파직했지만 세자빈 강씨 사건의 재조사는 거부했다. 그에게 형수 강빈은 자신의 정통성을 흔드는 금기어였다.

왕권에 대한 정통성이 약했던 효종이 명에 대한 대의명분을 내세운 산림의 마음을 얻기 위해 꺼내든 것은 북벌이었다. 숙청 위기에 몰린 김자점은 "효종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다"고 청나라에 밀고했다. 효종은 왜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라 둘러 댔다. 김자점은 청나라를 등에 업고 권력 회복을 노렸으나 아들 김식을 포함한 역모가 적발됐다. 가혹한 고문 끝에 그는 능지처참된다.

북벌은 왕권 강화에 효과적이었다. 효종은 어영청과 수어청을 정비하여 왕과 남한산성을 방어하게 했다. 기병을 중앙군 중심으로 재편하고, 조총병을 양성했다. 1653년 효종은 제주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을 벨테브레(박연)와 함께 홍이포紅夷砲 등을 개발하게 했다. 홍이포는 붉은 머리를 한 오랑캐들이 사용하는 대포라는 뜻이다. 일본으로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간 하멜은 “하멜 표류기"에 당시 상황을 "그들은 세계의 무게가 자기들 어깨에 얹혀 있는 것처럼 맹렬히 군사훈련을 한다."고 기록했다.

17세기 소빙하기로 인한 이상 저온으로 러시아가 담비 가죽 등의 모피를 얻기 위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청과 충돌한다. 1654년 러시아에 연전연패하던 청은 나선(러시아) 정벌에 조총수 파견을 요청한다. 이에 200여 명의 조선군은 청나라와 연합하여 러시아 함선을 물리친다. 제1차 나선정벌이었다. 1658년 러시아의 재침에 청은 다시 조선군을 요청했다. 260여 명의 제2차 나선정벌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에서 러시아 함대 11척 중 10척을 불태우는 승리를 거둔다. 조선군은 자신감으로 충전됐다.

1659년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한 자리에서 “예전의 칸은 인재가 많았는데 지금은 용렬하며, 점점 무사를 폐하고 중국의 일을 본받고 있다. 우리가 10만 포병을 기르면 중원의 영웅들이 호응할 것이다.”라 말한다. 그러자 송시열은 제왕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바로 잡는 것이 급선무라고 답한다. 북벌은 이상적 담론이었다. 효종에게는 왕권강화, 숭명반청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사림에게는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게다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50년간 이어진 전란으로 인구 감소와 국토 황폐도 심각했다.
 
훗날 송시열은 사사될 때 제자에게 자신이 공부했던 화양동 계곡에 사당을 지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사당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만력제와 명의 마지막 황제 숭종제를 기리는 만동묘였다. 그리고 창덕궁에는 대보단이 들어섰다. 정신적으로 명의 후계자라는 선언이었다. 명은 조선에 부활했다. 정권을 잡고 있는 서인과 송시열은 위험을 무릅쓰고 북벌을 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만동묘는 황하가 만 번을 꺾여도 결국 동쪽(조선)으로 흐른다는 만절필동에서 유래한다. 
 
송시열과 독대 후 3개월 만에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은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사인은 얼굴에 난 종기, 여드름이었다. 수전증을 가진 어의 신가귀에게 침을 맞은 효종은 낫는 듯 했으나 이내 과다출혈로 쇼크사하고 말았다. 원래 어깨가 넓고 청룡언월도를 들 정도로 건장했던 효종의 시신은 관이 맞지 않을 정도로 부어 있어 독살설이 퍼졌다.

효종은 국가 재정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현실적 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북벌 반대론자인 김육을 대사헌으로 삼아 대동법을 충청도와 전라도로 확대하여 농민 생활 안정과 국가 재정이 충실해졌다. 또한 화폐를 유통시키고 아담 샬의 시헌력을 도입해 농업을 안정시켰다.
 
조선의 왕들 중 유일하게 사대에서 자유로웠던 효종은 왕권을 회복하고 왜란과 호란으로 무너져가던 조선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승하하자 자의대비의 복상을 놓고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논쟁이 불을 뿜는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부모는 자식이 졸할 경우 장자는 삼년상, 차자 이하는 1년 상이었다. 과연 계모 자의대비의 상복은 몇 년상이어야 했을까?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구례 화엄사에는 벽암선사가 심은 올벚나무가 있다. 1632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화엄사를 중수한 벽암선사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삼 천여 명의 승군을 이끌고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항복 소식을 듣는다. 효종에게 화엄을 강론했던 벽암선사... 그는 북벌을 위해 화엄사 근처에 올벚나무를 심었다. 그 중에 한 그루 남은 올벚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그 날의 기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