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사

2-10. 몰가부 로맨스 - 할미꽃

flower-hong 2024. 9. 10. 12:43

이름만 들어도 애잔한 할미꽃... 늙은 시어머니 풀, 노고초老姑草 혹은 머리 하얀 노인, 백두옹白頭翁으로도 불리는 할미꽃은 구부러진 꽃대와 꽃이 지고나면 할머니처럼 산발한 머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할미꽃


645년 안시성 전투의 승리로 지지기반이 불안했던 연개소문은 권력을 확실히 장악한다. 그는 태대대로에 올라 남생, 남건, 남산 세 아들에게 권력 세습을 추진한다. 한편 호시탐탐 고구려에 설욕을 노리던 당태종이 돌연 사망하자 당고종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한동안 고구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에 포위된 것이다. 
 

할미꽃


661년 신라 30대 문무왕(626~681)이 즉위한다. 문무왕은 무열왕의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쉽지 않았다. 668년 연개소문이 갑자기 죽자 형제들은 분열했다. 두 동생에게 배신당한 연남생은 당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당은 요동, 신라는 평양성으로 진격한다. 결국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신라에는 계림대도독부로 설치하여 한반도 지배 야욕을 드러냈다. 고구려, 백제 유민과 연합한 신라는 기벌포 전투의 승리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러나 만주를 비롯한 드넓은 고구려의 영토를 상실하고 말았다.  

동해를 지키는 호국룡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긴 문무왕을 이어 31대 신문왕(661~692)이 즉위할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 공신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왕은 장인 김흠돌(?~681)이 일으킨 난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국학 설치 및 행정과 군사조직을 개편하고 녹읍을 폐지하는 등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6두품이 부상했다. 그 가운데에는 그의 외사촌 설총이 있었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설총의 화왕계花王戒가 전한다. 화왕을 타이른다는 화왕계는 고려 말에 유행한 사물을 의인화하여 꾸며낸假 일대기傳를 쓰는 가전체 문학의 시초로 장미를 간신, 할미꽃은 충신에 비유한 우리나라 최초의 콩트다

"신문왕이 설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청하자 설총은 “옛날에 꽃나라 임금花王 모란이 처음 왔을 때입니다.”로 시작한다. 화왕은 붉고 화려한 장미를 가까이 두려한다. 그 때 초라한 행색의 백두옹이 ‘군자는 명주실과 삼실처럼 귀한 것도 좋지만 왕골과 띠풀처럼 천한 것도 버리지 않고 모자람에 대비해야 합니다. 맹자가 성인이었음에도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정직한 자를 가까이 하는 임금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자 화왕은 ‘내가 잘못했다.’며 백두옹을 곁에 둔다.”
 

장미

 

설총은 원효대사의 아들이다. 원효와 의상은 분열된 세상을 불교적 이상사회로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삶의 방향은 달랐다. 660년 당나라로 함께 유학을 떠난 둘은 무덤가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 원효는 모든 것이 마음에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닫고 발길을 돌리지만, 의상은 유학길에 오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갑자기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겠노라”는 노래를 부르며 다녔다고 한다. 아무도 그 뜻을 이해 못했지만 무열왕은 과부인 요석공주를 통해 큰 인재를 낳겠다는 뜻으로 알고 그를 부른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에 원효는 문천교에서 일부러 물에 빠졌고, 무열왕은 그를 요석공주에게 보낸다. 그리고 설총을 낳았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도끼 없는 자루, 몰가부沒柯斧 로맨스였다. 이후 원효가 소요산에서 수행할 때 요석공주는 산 아래 별궁을 짓고 설총과 함께 석달 간 예배를 올렸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목향장미



원효는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통합의 길을 적극적으로 찾는 화쟁사상으로, 의상은 불교적 평등에 근거한 정도사상으로 통일신라의 정신적 등불이 되었다. 원효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한다는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워도 극락정토에 이른다는 아미타 신앙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했다면, 할미꽃의 화왕계로 신문왕을 깨우친 설총은 유교 경전 보급을 위한 ‘이두’를 집대성했다. 통일신라의 백성을 떠받치는 대들보가 된 것이다.

※ 만파식적

"삼국유사"에는 만파식적 설화도 전한다. "동해에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온다는 보고에 신문왕이 점을 치자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영혼이 보배를 주려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가서 보니, 바다 위 거북머리를 닮은 산 위의 대나무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왕이 배를 타고 산에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바치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대나무도 합쳐질 때 소리가 나는 법, 이것은 왕이 소리의 이치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좋은 징조"라고 말했다. 신문왕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피리를 불면 적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뭄이 그치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만파식적이란 세상의 온갖 파란萬波을 없애고 평안하게息 하는 피리笛라는 뜻으로, 이 설화는 일본에 대한 경계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