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사

2-08. 얼레리 꼴레리 선화공주 - 마

flower-hong 2024. 8. 30. 12:39

아파트 뒷산의 계단 철책을 휘감은 ‘마’의 줄기에 참나리처럼 동그란 주아가 달렸다. 마의 뿌리는 고구마, 색깔은 감자와 비슷하다. 아삭한 마의 성분인 뮤신은 끈적거리며 식이섬유가 많아 장 건강에 좋다. 아미노산이 풍부해 면역력을 높이며, 자양강장에 좋아 산약山藥으로 불린다. 뿌리에는 이눌린이 많아 당뇨와 비만에 좋다. 마는 도토리, 칡 등과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이었다.
 

마의 주아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에게 느릅나무가 있었다면 백제 30대 무왕(580~641)과 선화공주 사이에는 마가 있었다. “삼국사기(1145년)”에 의하며 무왕은 29대 법왕의 아들이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에 의하면 그는 신라 26대 진평왕(565~632)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서라벌로 들어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서동요를 퍼트리게 한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마를 파는 아이라는 뜻)과의 밀애를 암시하는 소문은 금세 퍼졌고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보낸다. 공주가 유배지로 가던 중 서동이 나타나 아내로 맞이한다. 서동은 공주가 자신이 가져온 금으로 생계를 꾸리려 하자 마 밭에는 그와 같은 것이 흙처럼 쌓였다고 말했다. 둘은 지명법사의 신통력을 빌어 금을 신라로 옮겼다. 진평왕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선화공주와 함께 미륵삼존을 알현한 못가에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것이 서동 설화다.
 

마 열매


서동 설화의 사실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어 신라의 왕권을 차지하려는 무왕의 정략결혼이었다고도 한다. 유럽 왕가에서나 있을 법한 왕위 계승이 삼국시대에도 가능했을까? 실제로 신라는 제2대 남해왕이 아들과 사위, 양자를 막론하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박석김 삼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4대 석탈해왕은 남해왕의 사위이며, 13대 미추왕의 선조 김알지는 석탈해왕의 양자다. 따라서 무왕도 신라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마밥

 

진평왕에게는 천명, 덕만, 선화공주 세 딸이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천명공주는 김용춘과 결혼한다. 무왕과 김용춘은 동서지간이었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긴장감이 돌았다. 600년 무왕이 즉위하자 백제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602년 무왕은 신라를 공격하고 611년에는 가잠성을 점령했다. 이때 가잠성을 지키던 찬덕은 중과부적임에도 백일 동안 맞서 싸우다가 차라리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모두 죽이겠다며 느티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한다. 이후 가잠성은 괴산槐山이 되었다. 느티나무는 한자어로 괴목槐木이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무왕과 김용춘의 주도 하에 벌어진 양국 전쟁을 '동서同壻 전쟁'으로 명명한다. 진평왕이 덕만공주를 후계자로 삼고 사위 김용춘으로 하여금 선덕여왕은 보필하게 한 것은 무왕을 자극하기 않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추정했다. 632년 마침내 덕만공주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이 되었고, 천명공주의 아들 김춘추는 29대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2009년 미륵사지서석탑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영기에 의해 미륵사는 실제로 무왕의 재위기에 창건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리함 명문에는 무왕의 왕비는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선화 공주와의 결혼은 후대에 꾸며진 허구라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당시 왕들은 여러 명의 왕비를 둘 수 있었다.

무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에도 왕위 계승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신라와 일진일퇴의 양보 없는 전투를 치렀다. 그는 무령왕과 성왕 이후 쇠락하던 백제의 중흥을 위해 계단 철책을 칭칭 감싸며 기어오르는 마 덩굴처럼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군주였다. 마를 팔면서 가짜 뉴스(?)를 퍼뜨려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백제와 신라의 왕이 되고자 했던 야심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