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사

2-11. 임금님 귀는? - 산수유

flower-hong 2024. 9. 19. 11:46

노란 산수유... ‘풍륜’이라 이름 붙인 자전거로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자전거 여행(2000년)”을 쓴 김훈 작가는 사물을 꿰뚫는 그만의 글쓰기로 산수유에게 말을 건넨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있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서울교대, 0322)

 


정기를 보강하는 산수유는 사장의 푸념을 광고하는 역발상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31대 신문왕 당시 정치적 안정을 찾은 통일신라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8세기 초 당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혜초가 다섯 천축국을 답사하고 그들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기록한 "왕오천축국전(727년)"이 발간되는 등 국제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천축天竺은 하늘의 불국, 즉 부처의 성지란 뜻으로 천축국은 고대 인도를 말한다.
 
32대 효소왕(687~702), 33대 성덕왕(691~737), 34대 효성왕(?~742)을 이은 35대 경덕왕 (723~765)은 불교 중흥에 힘썼다. 불국사와 석굴암과 같은 대규모 불사가 중창되었으며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이 주조되었다. 그는 당과 활발히 교역하며 신라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으나 36대 혜공왕(758~780)에 이르러 왕권 누수가 시작되었다. 37대 선덕왕(?~~785)부터 47대 헌안왕(?~861)까지 11명의 재위는 평균 7년에 불과했다. 특히 41대 헌덕왕(770~826) 당시 김헌창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옛 백제 지역에 장안국을 세우는 등 왕권이 큰 타격을 입었다.
 
42대 흥덕왕이 승하하자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그의 조카인 김제륭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김균정이 패하자 아들 김우징은 해상왕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거사를 일으켰다. 김우징은 43대 희강왕을 쿠데타로 몰아낸 44대 민애왕(817~839) 축출하고 45대 신무왕(?~839)에 올랐다. 그러나 병으로 1년 만에 승하하자 46대 문성왕(?~857)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기를 거부했다. 846년 장보고가 일으킨 난은 부하인 염장의 배신으로 진압되었으나 청해진 폐쇄로 국제 교류는 위축되었다.
 
장보고의 최고 교역품 중 하나는 제주와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황칠나무였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백제 온조왕 당시 황칠로 칠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기록한다. 조선시대에도 황칠은 중요한 조공품으로 황룡포와 용상, 천장, 벽면 등을 황칠로 마감했다. 또한 황칠은 벌레를 쫓아내고 정신을 맑게 하는 향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약재로도 쓰였다.

 

황칠나무(제주도 협재리, 0828)


47대 헌안왕(?~861)이 아들이 없이 승하하자 사위인 48대 경문왕(846~875)이 즉위한다. “삼국유사(1281년)”에는 경문왕의 당나귀 귀 설화가 전한다.
  
“어느 날 갑자기 경문왕의 귀가 자라기 시작했다. 아무도 몰랐으나 모자 장인은 알고 있었다. 평생 비밀로 간직했던 장인은 죽음이 다가오자 입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마음껏 소리 지른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 마다 그 소리가 메아리치자 경문왕은 대나무를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게 했다. 그 후로는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 들리게 되었다.”

 

산수유 열매(1020)


경문왕은 2남 1녀를 두었다. 그들은 순서대로 49대 헌강왕(?~886), 50대 정강왕(?~887), 51대 진성여왕(~898)이 되었으나 진성여왕은 숙부인 각간 위홍과 내통하였고, 미소년들과 음란 행위를 하는 등 정치뿐만 아니라 흉년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이었다. 885년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친 최치원이 귀국 후 만난 것은 혼돈이었다. 그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리고 6두품의 최고직인 아찬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절망하여 산으로 은거하고 말았다. 889년 마침내 농민이었던 원종과 애노를 시작으로 지방 호족세력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신라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