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살구꽃, 복사꽃... 봄이 지는 아쉬움을 모란이 피기까지는 기다리겠다는 시인의 설움을 떠올리는 5월이다. 모란은 굵은 뿌리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수컷의 형상과 같다는 ‘모牡’와 꽃 색깔이 붉다는 ‘단丹’의 합성어에서 유래한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647)의 모란 일화가 전한다.
“당나라 황제가 모란꽃 그림과 그 씨앗을 보내와서 진평왕이 덕만에게 보여주었더니, 덕만이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라고 하니 “꽃은 매우 예쁘지만 그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것은 향기가 없는 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씨앗을 심었더니 과연 그러하였고, 우리나라의 모란꽃이 이때부터 많아지기 시작했다.”

신라의 전성기를 누린 진흥왕과 진지왕을 이은 26대 진평왕(565~632)에게는 천명, 덕만, 선화공주 세 딸이 있었다. 진평왕은 주위의 반발을 무릎쓰고 사위 김용춘(천명공주)과 무왕(선화공주) 대신에 덕만공주를 여왕으로 선택했다. 27대 선덕여왕(606~647)은 향기 없는 모란꽃에 맞서 향기가 난다는 뜻의 분황사芬皇寺와 과학기술의 결정체인 첨성대를 건축했다.
모란 일화는 역사적 사실일까? 국토문화재연구원에 의하면, 당나라에서 모란은 750년경부터 재배되었기 때문에 향기가 없고, 나비가 날아들지 않으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 것은 후사를 얻지 못한 선덕여왕에 대한 은유로 추론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당태종이 모란을 세 가지 색깔, 즉 붉은색·자주색·흰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는 것에서 세 가지 색깔은 세 명의 남자를, 향기가 없다는 것은 후사가 없는 것으로 추론한다. “화랑세기”에는 이와 관련한 삼서지제三婿之制의 기록이 전한다.

“공주가 즉위하자 공(용춘)을 지아비로 삼았지만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물러나고자 했다. 이에 뭇 신하가 삼서지제를 논하여 흠반공과 을제공으로 왕을 보좌토록 했다. (중략)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도록 했다. 공은 천명공주를 처로,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다.”
이처럼 여왕이 후사를 얻기 위해 세 명의 남자를 씨내리로 들인 삼서지제가 모란 설화로 변했다는 것이다. 한편 백제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로 불리던 31대 의자왕(599~660)이 즉위한다. 그는 무왕에 이어 정치를 안정시켰으며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난공불락인 대야성(합천)을 함락시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의 가족을 죽인다. 그리고 신라가 성왕을 경주 신작로에 묻었던 것처럼, 백제 궁궐에 묻어 백제인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김춘추의 피는 끓어 올랐으나 643년 연개소문과 화친을 맺은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공격했다.

여왕은 선정을 베풀 수 없다며 비담이 일으킨 난을 토벌하던 중 선덕여왕이 승하하자 28대 진덕여왕(?~654)이 왕위에 올랐다. 진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648년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나·당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의자왕은 차츰 사치와 방탕에 빠져 들면서 국제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당은 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요구했으나 의자왕은 당과의 외교를 단절해 버렸다. 656년 의자왕이 향락에 빠져들자 간언을 올린 좌평 성충이 투옥된다. 성충은 외적이 침입하면 육로는 탄현, 수로는 기벌포를 방어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654년 화백회의에 의해 태종무열왕(603~661)이 즉위한다.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당나라군은 백강으로,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다.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저항했으나 화랑 반굴과 관창의 살신성인에 사기가 오른 신라군에 패하고 말았다.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신하들과 함께 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위의 원수를 갚은 무열왕은 삼한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대왕으로 불리지만 신채호는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역사의 죄인’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삼국통일 직전까지도 신라를 거세게 몰아부치던 백제... 의자왕은 삼천궁녀들과 주색에 빠진 호색한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삼천궁녀를 기록한 사서는 없다. 삼천궁녀는 조선시대 성종 당시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기니’라는 시조에 처음 등장한다. 명종 때의 민제인은 ‘백마강부’에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고’라고 썼다. 삼천궁녀와 낙화암은 망국의 군주 의자왕에게 씌워진, 계단 철책을 칭칭 감싼 마 덩굴처럼 그를 옥죄는 패자의 굴레였다. 의롭고 자애롭다는 의자왕義慈王은 그의 업적을 기려 주어진 시호가 아니라 원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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