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버드나무, 메타세쿼이아, 양버즘나무, 느릅나무, 벚나무... 그 중 느릅나무 아래서 연인의 팔베개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청춘들에서 오래 전 보았던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1924년)"을 떠올린다. 여기서 집을 뒤덮은 커다란 느릅나무는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암시하는 나무였다.
느릅나무는 껍질을 벗겨서 물을 불리면 끈적끈적하게 힘없이 늘어진다는 '느름'에서 유래한다. 껍질은 피부질환, 비염, 축농증 등에 효과가 있어 ‘코나무’라 불린다. 또한 전분이 많은 속껍질은 가루로 빻아 음식을 만들던 구황식물로 "구황촬요(1554년)"에는 평소에 솔잎과 느릅나무 껍질을 흉년에 대비해 비축할 것을 추천한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온달장군의 느릅나무 일화가 전한다.

“고구려 25대 평원왕(557~590)은 평강공주가 울 때마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며 놀린다. 성장한 평강공주는 온달을 찾아간다. 그러나 노모는 아들이 느릅나무 껍질을 하러 간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며 거절한다. 마침 지게를 지고 오는 온달... 결혼을 청하자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공주와 결혼한 온달은 무예를 익혀 사냥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후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신라와의 아단성 전투(590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관이 움직이지 않자 평강공주가 “삶과 죽음이 정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시옵소서.”하며 관을 어루만지자 움직였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정도의 사리분별이면 바보 온달은 영웅담을 극화하기 위한 설정이었을 것이다. 이때 온달이 구해온 느릅나무는 땔감이 아닌 식량이었다.
평원왕이 승하하자 26대 영양왕(?~618)이 즉위한다. 당시 수나라는 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중원을 통일했으나 만리장성 이북의 돌궐과 고구려는 눈엣가시였다. 주변국들은 일찌감치 조공을 바쳐 왔지만 고구려는 거부했다. 598년 평원왕 때부터 수와의 일전을 대비하던 고구려는 요서를 선제 공격한다. 이에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장마로 인한 전염병과 보급 문제로 퇴각한다.

612년 수양제는 육군 113만, 수군 4만을 이끌고 재침했다. 아버지 수문제를 시해하고 패륜을 일삼았던 그는 연호를 대업大業으로 고치고 북경과 항주를 잇는 1500 km의 대운하 건설을 추진한다. 그리고 대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짓고 운하 옆에는 수양버들과 느릅나무를 심었다. 또한 그는 낙양에 동경을 건설한다. 각지에서 희귀한 석재와 목재를 수집하면서 수십만 명이 죽어갔다. 낙양의 서쪽에는 3개의 인공 섬을 갖춘 대규모 서원을 건설한다. 그러한 수양제의 최악의 선택은 고구려 침공이었다. 청야수성 전술로 맞선 요동성은 난공불락이었다. 다급한 수양제는 우중문의 30만 별동대를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시켰다. 을지문덕은 그들을 살수(청천강)를 넘어 평양성 근처로 유인했다. 자신의 식량을 짊어지고 진격한 수나라군의 피로는 극에 달했다. 수군은 육군이 늦어지자 홀로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대패한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서신을 보낸다. “그대의 귀신같은 꾀는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절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통달하였도다. 전쟁에서 승리한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하고 그만 돌아감이 어떠한가.” 이를 핑계로 우중문은 회군한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총공격에 의해 살수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613년, 614년 수양제는 거듭해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국가 재정은 바닥나고 곳곳에서 사기가 꺾인 탈영병이 속출하면서 철군했다. 이후 수양제의 사치와 토목공사가 절정에 달하고 많은 양민이 처참히 죽어갔다. 617년 결국 중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수양제는 제위에서 물러나고, 618년 살해되어 수나라는 3대 3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4차에 걸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전근대 역사상 헤로도토스가 500만으로 기록한 페르시아 전쟁에 이은 두 번째로 큰 단일 전쟁이었다.

수양제를 몰아낸 당고조 이연에 이어 626년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한다.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고 침입에 대비했다. 그러나 27대 영류왕(?~642)이 유화책을 취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시해하고 28대 보장왕(?~682)을 내세웠다. 645년 당태종은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켰으나 양만춘 장군이 지키는 안시성은 견고했다. 당태종은 60일 간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았으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고구려군에게 점령 당하고 말았다.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구가한 당태종도 고구려만은 어쩔 수 없었다. 화살에 한쪽 눈을 실명한 채 퇴각한 당태종은 다시는 요동 정벌에 나서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동북아의 호랑이 고구려... 수나라, 당나라도 어찌할 수 없었던 고구려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일국의 공주가 느릅나무로 끼니를 연명해야했던 나뭇꾼에게 시집가는 신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그 무언가는 아닐까? 그러나 계속된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운도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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