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사

2-02. 기자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고사리

flower-hong 2024. 8. 3. 22:00

불판 위로 두툼한 삼겹살과 물에 불린 고사리가 올라온다. 삼겹살에 웬 고사리일까 싶지만, 제주에는 고사리 삼겹살 맛집이 있을 정도다. 포자로 번식하는 고사리는 돌돌 말린(, 곡) 새순이 국수 등을 말은 ‘사리’와 닮은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생고사리는 비타민B1(티아민) 분해 효소가 있어 소를 비롯한 가축들은 먹지 않는다. 사마천의 “사기열전(BC91년)”에는 충신의 대명사인 백이·숙제와 고사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고사리 삼겹살

 
“은나라의 고죽국에는 백이, 아빙, 숙제 삼형제가 있었다. 왕은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그는 백이에게 양보했다. 백이가 아버지의 뜻이라며 사양하고 피신해 버렸다. 이에 숙제도 형을 따라 가버리자 아빙이 왕위를 이었다. 이리저리 떠돌던 백이·숙제는 주나라의 무왕이 상국인 은나라의 주왕을 치려는 것을 보고 말렸다. 화난 무왕이 형제를 죽이려 하자 강태공이 그들은 의인이라며 변호했다. 무왕은 반정에 성공했고, 백이·숙제는 주나라에서 나는 곡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 등을 캐먹다가 굶어 죽었다.”
 

고사리의 포자

 
무왕이 반정을 일으킨 것은 BC1046년이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392년 새로운 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조선’과 자신의 고향인 ‘화령’을 나라 이름으로 명나라에 주청을 올린다. 이에 주원장은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오래 전부터 전래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으라 한다. 왜 아름다운 조선이라 했을까? “삼국유사”에는 주나라 무왕에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
 
“단군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정한 후 도읍을 아사달로 옮겼다. 그는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의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였다. 이에 단군은 도읍을 장단경으로 옮겼다가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살면서 산신이 되었다.”

기자조선의 기자는 은나라 주왕의 숙부로 백이·숙제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주왕은 술로 연못을 만들고, 나무에 매단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폭군이었다. 그가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자 기자는 상아 젓가락을 쓰면 그에 맞는 옥그릇과 미식을 찾을 것이며, 거친 베옷과 소박한 궁전이 싫어질 것이라는 간언을 올렸으나 투옥되고 말았다. 결국 은나라가 멸망하자 기자는 한 무리를 이끌고 동쪽 조선으로 떠났다.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제후로 책봉했다는 것이 '기자동래설'이다.
 

보스톤고사리, 관중고사리
고비, 도깨비쇠고비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 짜는 법 등을 가르치고, 8조법을 행했다. 춘추전국시대(BC770~BC221)의 혼란기에 기자조선은 그들의 이상향이었다. 공자는 조선에 뗏목을 타고 가서라도 예의를 배우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동방예의지국도 기자조선을 일컫는 말이다. 명나라의 주원장이 아름다운 조선이라 칭한 이유다. 그러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BC3세기 이후부터 나오며, BC11세기의 중국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비파형 동검 문화는 계통이 달라서 기자동래설은 입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려와 조선은 기자동래설을 믿었다.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신진사대부에게 우리 역사에 공자가 흠모하던 기자조선이 있다는 것은 사대주의 자부심의 근거였다. 조선도 중화의 일부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조차 우리 역사를 단군-기자-위만조선의 삼한으로 도식화하기도 했다.
 
은나라가 멸망하자 동쪽으로 간 기자와는 달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 등으로 연명하다가 굶어죽은 백이·숙제는 한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다. 그러나 중국의 대문호인 루쉰은 “고사리를 캔 이야기(1935년)”에서 그들을 위선자로 폄하한다. 그에게 백이·숙제는 주왕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명분만을 중시하며 국운이 다한 은나라에 충성하는 어리석은 자였다.

「두 사람은 배가 고팠다. 그들은 날마다 고사리를 뜯어 탕과 죽을 끓여 먹었다. 그러나 수양산 고사리도 주나라의 것이라는 말에 식음을 전폐하자 안타깝게 여긴 옥황상제가 암사슴을 보내어 그 젖으로 살린다. 기력을 회복한 그들은 고기가 먹고 싶어 암사슴을 잡아먹으려 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신통력이 있는 사슴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사리도 암사슴의 젖도 먹을 수 없게 된 백이·숙제는 아사했다.」

꿩고비

봄꽃이 한창인 4월... 제주에 고사리 장마가 내리면 한라산 청정 고사리 축제가 열리고 중산간 지대의 목장과 오름에는 고사리를 꺾는 인파로 북적인다. 고사리국, 고사리조림, 고사리나물볶음, 고사리장아찌, 고사리전, 고사리육개장 등으로 먹는 고사리에는 3천여 년전 왕위를 고사固辭하고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고사枯死한 백이·숙제와 조선으로 향한 기자의 역사가 있다.   
 
※ 고사리 사촌 고비

고사리와 비슷한 ‘고비’는 새순이 줄기 끝에 외가닥으로 돌돌 말리며, 한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나온다. 반면에 고사리는 끝이 말려있으며 한 뿌리에서 나온 줄기가 여러 가닥으로 나뉜다. 고비도 굽었다는 '곱'과 명사파생접미사 '이'의 합성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