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훈련소에서 돌아오는 길... 언젠간 가야할 곳으로 마음에 담아둔 무령왕릉으로 향한다. 입구에 들어서자 금송金松이 우뚝 서 있다. 일본 원산의 금송은 잎 뒷면이 황백색인데서 유래하며 잎 모양이 우산처럼 펼쳐져 있어 영어로는 Japanese umbrella-pine이다. 일왕을 상징하는 나무로 일본에서는 궁궐의 기둥이나 관재에 널리 쓰이는 나무다. 그러한 금송이 무령왕릉에?
1971년 공주 송산리 벽돌무덤 5·6호 고분군의 장마철 배수로 공사 중, 삽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부딪혔다. 고고학 역사상 최고의 발굴로 한국판 투탕카멘이라는 무령왕릉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발굴에 걸린 시간은 불과 단 하루였다.

21대 개로왕(417~475)이 전쟁터에서 사망한 후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왕권이 약화되면서 22대 문주왕(?~477)과 23대 삼근왕(465~479)이 연이어 피살되었다. 24대 동성왕(?~501)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는 등 활발한 외교정책을 펴고 왕권을 강화시켰으나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위사좌평 백가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나락으로 향하던 시기에 왕위에 오른 25대 무령왕(462~523)은 백가를 토벌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룬다. 512년 위천 전투에서 철천지원수 고구려를 대파하고,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양무제는 무령왕에게 고구려 22대 안장왕(498~531)의 영동장군보다 높은 영동대장군의 작호를 내렸다. 선조들의 치적에 가려져 있지만 안장왕도 고구려 전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명군이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48년)”에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춘향전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안장왕의 러브 스토리가 전한다.
"백제로 염탐 갔던 태자 흥안이 백제 정찰관을 피해 숨어든 저택에서 한주를 만났다. 서로 부부의 연을 약속한 그는 "귀국하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라며 떠났으나 백제에 계속 패한다. 이즈음 한주는 신임 태수의 혼인을 거절한다. 태수는 그녀를 투옥하고 회유한다. 한주는 단심가로 답한다. “죽어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안장왕은 한주를 구하는 자에게 천금의 금과 만호후의 직위를 약속한다. 그러나 을밀은 안장왕의 동생인 안학공주와의 결혼을 포상으로 요구했다. 태수의 잔칫날, 을밀은 정예 20명을 뽑아서 성 안으로 잠입해서 한주를 구해낸다."

백제하면 의자왕과 함께 무령왕을 떠올리는 것은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덕분이었다. 그 안에서 지석, 금제관식, 금귀고리, 금목걸이, 은팔찌, 무령왕비 베개 등의 국보와 4천 6백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왕과 왕비의 시신을 넣은 목관은 당시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임이 밝혀졌다.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의 탄생 기록이 전한다.
“유라쿠 천황 5년에 개로왕은 동생 곤지를 일본에 파견한다. 이때 곤지는 임신 중이던 개로왕의 부인을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개로왕은 아내를 곤지와 보내면서 출산하면 귀국시키도록 명한다. 항해 도중 산기를 느낀 일행은 가카라시마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를 사마왕이라 불렀다.”

왜 곤지는 산달이 다가온 개로왕의 부인을 동행했을까? 과연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었을까? 위서 논란이 있는 "일본서기"의 기록에 학계는 반신반의했으나 무령왕릉에서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께서 계묘년에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뚜렷이 새겨진 묘지석이 발굴되었다. 이로 인해 개로왕과 문주왕, 곤지는 형제였으며 삼근왕은 문주왕, 동성왕과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 추정되었다. 개로왕은 장수왕에 맞서기 위해 문주왕을 신라, 곤지를 일본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금송이 발굴된 것은 백제와 일본이 단순한 문화 교류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2015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공주 공산성, 부여·익산의 백제유적 8곳과 함께 ‘백제역사 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무령왕이 쌓은 디딤돌을 기반으로 26대 성왕(504~554)은 도읍을 금강이 흐르는 평야가 펼쳐진 사비(부여)로 천도하고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재도약을 향한 백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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