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13. 고려-거란 전쟁 - 굴참나무

flower-hong 2024. 9. 26. 13:01

신림동의 굴참나무... 전설에 의하면 약 1,000년 전에 강감찬 장군이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랐다는 보호수다. 지금의 굴참나무는 약 250살 정도의 후계목으로 추정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도 신라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중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란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서울 신림동 강감찬 굴참나무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의 첫번 째 과제는 정치적 안정이었다. 그는 발해, 신라, 후백제, 후고구려의 유민을 받아들였다. 또한 지방 호족과의 정략 결혼을 통해 중앙과 지방이 연결되면서 고려는 차츰 단일민족 의식이 싹터 나갔다.
 
그러나 그 부작용은 만만치 않았다. 지방 호족들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렸다. 태조 왕건이 승하하자 장남인 2대 혜종(912~945)이 즉위한다. 나주 호족 출신으로 버들잎 설화의 주인공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인 그는 취약한 배경으로 암살 등의 불안에 시달리다가 2년 만에 승하한다. 이에 이복 동생 왕요가 3대 정종(923~949)으로 즉위했으나 혜종의 장인 왕규가 자신의 손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한 정종은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서경 천도를 추진하다가 병이 들자 동생인 4대 광종(925~975)에게 양위하고 죽었다.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왕위는 적장자를 원칙으로 하되, 그가 불초하면 둘째나 중망을 받는 자가 계승하도록 했다. 왕족 내에서 혈연의 가까움보다 자질을 우선한 택현擇賢이었다.

943년 광종은 고려가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했다. 서경 천도를 백지화한 그는 호족들이 소유한 노비들을 양민으로 되돌리는 노비안검법을 선포하고,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를 실시하는 등 고려를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적들이 제거되었다. 5대 경종(955~981)은 관리들에게 급여로 토지의 세금징수권을 주는 전시과를 실시했다. 전田은 밭, 시柴는 땔감용 임야다. 그러나 당시 최악의 법인 복수법을 허용하여 복수의 광기가 일기도 했다.
 


광종의 공포 정치와 복수법의 부작용을 보며 정치에 환멸을 느낀 경종은 정사를 소홀히 하다가 26세로 승하하고 사촌인 6대 성종(961~997)이 즉위한다. 그는 국자감과 향학을 설치하여 유학 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중원을 통일한 송나라는 고려에 거란을 협공할 것을 제의한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은 80만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한다. 고려의 첫 번째 위기였다. 서희는 송과의 외교 단절을 약속하고, 거란과 소홀한 것은 여진족 때문임을 주장하여 거란에게 소유권을 인정받은 강동 6주에서 여진족을 몰아냈다.
 
성종이 후사가 없자 경종의 세 번째 비인 천추태후의 아들이 7대 목종(980~1009)으로 즉위하면서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목종도 후사가 없자 천추태후는 내연남 김치양과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공덕일까? 경종의 네 번째 비인 헌정왕후가 사가에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이에 다음의 설화가 전한다.
 
“어느 날 헌정왕후는 곡령에 올라 소변을 누었더니, 온 나라에 흘러넘쳐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 이를 점쟁이에게 물었더니, 아들이 왕이 된다는 점괘가 나왔다. 헌정왕후는 과부인 내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는가? 했다.”
 
당시 태조 왕건의 다섯 번째 비인 신성왕후의 아들 왕욱과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는 집이 가까워 자주 왕래하다가 임신했다. 헌정왕후 가문은 치부를 숨기려 그들이 함께 있을 때 불을 지르는 바람에 그들의 관계가 드러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던 헌정왕후는 집 앞에서 산기를 느껴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대량원군 왕순을 낳고 죽었다. 태조 왕건의 버드나무에 이은 두 번째 버드나무였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왕순을 승려를 입적시키고 독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009년 목종은 왕순에게 양위하기 위해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호위를 명했다. 개경으로 향하던 그는 정변을 일으켜 천추태후와 그 측근들을 유배 보낸 후 목종을 시해하고 왕순을 8대 현종(992~1031)으로 추대했다.
 
1010년 거란은 서희와의 담판 후에도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지 않자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을 주장했으나 강감찬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까지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의 무시와 공격을 받는 등 지옥의 행군이었다. 그러나 개경을 함락시킨 거란은 후방의 병참선이 차단되자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화친을 맺고 철수한다. 이때 양규 등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018년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은 현종의 입조를 요구하며 3차로 고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고려는 강감찬 장군의 청야전술과 귀주대첩으로 대승을 거둔다. 이후 강동 6주는 고려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3차에 걸친 고려-거란 전쟁 후 9대 덕종(1016~1034)은 거란(요나라)와 여진족(금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 10대 정종(1918~1946) 당시 완공했다.
 

잎 뒷면이 은백색인 굴참나무, 연한 녹색이면 상수리나무, 밤나무는 잎맥이 17개 이상


골참나무에서 유래한 굴참나무는 잎 모양이 상수리나무, 밤나무와 비슷하지만 코르크 마개로도 쓰이는 겉껍질에 깊게 패인 골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늦가을까지 잎이 달려있어 ‘가을 참나무’라는 갈참나무,  넓은 잎으로 떡을 싸서 떡갈나무, 짚신에 깔아서 신갈나무, 도토리가 작은 졸병참나무에서 졸참나무,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수라상에 올랐던 상수리나무 등이 있다. 참나무는 ‘도토리가 열리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나무’를 총칭한다.

지팡이 설화의 굴참나무... 지팡이에서 나무로 생명의 순리를 거스리는 설화는 국난 극복의 기적을 바라는 간절함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