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

1-01. 이재효 갤러리의 리아트리스

flower-hong 2024. 7. 21. 09:02

7월의 한여름 더위에 찾아 나선 경기도 양평의 이재효 갤러리... 창의적이면서 독특한 조각품들이 여느 미술관과는 다른 구도로 전시되어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작품 소재였을까? 가운데에 홈을 판 돌멩이를 진주 목걸이처럼 주렁주렁 매단 전시관 입구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돌에 홈을 내어 철사로 매단 작품

갤러리의 주인장 이재효는 일상의 나무, 돌, 못, 낙엽, 공구, 철근 등의 각종 재료를 그 성질과 형태에 맞게 자연스럽게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조각가다. 그러한 반복의 한없는 인내로 그만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나무로 만든 작품

그 작품들 사이로 눈에 띤 화려한 보라색의 리아트리스Liatris... 추위에 강해 월동이 가능한 여러해살이풀로 영어로는 타오르는 별blazing star이다. 공원에서도 종종 마주치는 리아트리스에서 베아트리스Beatrice를 떠올린다. 베아트리스는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대서사시 신곡神曲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의 프랑스어다.
 

이재효 갤러리의 리아트리스(blazing star)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포르티나리 가문의 축제에 참석한 9세 소년 단테는 8세 소녀 베아트리체에게 그의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단테는 죽는 날까지 소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9년 후 우연히 마주친 베아트리체... 뜻밖에 그녀는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상냥한 미소로 지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단테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순간을 보내고 말았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단테의 초상화(1495년)

단테는 관례에 따라 가문에서 정해준 여인과 약혼한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24세에 콜레라로 요절했다는 소식에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졌다. 26세에 약혼녀와 결혼한 그는 베아트리체를 향한 연시를 모아 청춘의 고뇌와 사랑의 참회를 담은 "새로운 인생(1294년)"을 출간했다. 오직 신의 절대적인 사랑만이 찬미의 대상이었던 중세 시대에 인간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그는 정치에 뛰어든다. 당시 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기벨린당과 교황의 겔프당이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단테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지지하는 겔프당이었다. 1289년 캄팔디노 평원의 전투에서 패한 기벨린당은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단테는 35세에 피렌체 최고위직인 6인의 행정위원 중 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교황이 영토확장의 야욕을 드러내자 겔프당은 귀족 계급과의 연대를 꾀하는 흑당과 신흥 상인 계급의 권익 신장과 정치 세력화를 꾀하던 백당으로 분열한다. 단테가 속한 백당은 교황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치정부를 주장하여 승리했으나 이후 흑당의 반격에 패한다. 그는 뇌물 수수 및 횡령 등의 죄목으로 피렌체에서 추방된다.
 

못을 이용한 작품

여기저기 떠돌던 그가 마주한 것은 교회와 정치의 부패, 참혹한 민중의 삶이었다. 이에 단테는 세계 고전 문학의 걸작인 대서사시 신곡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맞춰 지옥 3일, 연옥 3일, 천국에서 하루 등 일주일간의 구원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그린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단테에게 문학적 스승인 베르길리우스를 보낸다. 단테는 그를 따라 비명과 악취가 진동하는 지옥을 지나 참회와 회개 속에서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연옥을 통과하고 베아트리체와 함께 천국에 이른다. 신곡은 당대 사회 문제에 대한 분석과 시상의 창의성,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르네상스 문학의 지평을 연 불멸의 걸작이었다.  

단테는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역설하며 베아트리체를 동정녀 마리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서양에서 베아트리체는 로미오의 줄리엣에 버금가는 연인의 대명사다. 
 

공원의 리아트리스

리아트리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어둠 속에 방황하던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blazing star'였다. 인간을 신을 찾은 행복한 사람, 찾으려 애쓰나 못 찾은 불행한 사람, 찾지도 않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나누었던 단테... 그는 단 두 번의 만남으로 평생의 뮤즈로 삼은 베아트리체를 찾아 나선 사람이었다. 14세 연상 루 살로메를 사랑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50여 년간 모드 곤을 일방적으로 연모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 그들은 아홉 살에 만난 소녀를 평생 잊지 못한 단테 알리기에리에게 말한다. You win. 
 

철골 소나무
새집 나무, 모이면 작품이 된다.

2층의 유리 통창 너머로 바라본 탁트인 바깥 풍경이 시원스런 이재효 갤러리의 리아트리스에서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만났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짝사랑하던 여인도 베아트리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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