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계절 풀꽃나무_3

23. 접시꽃 당신

flower-hong 2025. 5. 27. 08:23

무거운 봇짐을 머리에 이고 먼 길을 가는 어머니처럼, 하늘을 향해 무거운 꽃대를 휘청 거리며 길게 뻗어 올린 꽃... 한 때 “접시꽃도 몰라요?”라는 핀잔을 들었던 꽃이다. ‘아! 이 꽃이...’ 접시꽃에서 자동반사로 떠올린 것은 ‘접시꽃 당신’(1986년)이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중략) /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 왔습니다 (중략) /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 새벽이 어는 순간까지 /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접시꽃


아내의 암 발병에 시인은 떨렸다. 긴 밤을 지새우고 출근하는 버스 밖 창가로 시골집 울타리에 핀 하얀 접시꽃이 보였다. 창백한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접시꽃 당신은 두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며 흐르는 눈물로 써 내려간 시였다.
 
접시꽃은 납작한 접시를 닮은 둥근 꽃에서 유래한다. 한자어로는 '촉나라의 아욱꽃'이라는 촉규화다. 하얀 꽃이 작은 단처럼 보인다는 백당나무도 ‘접시꽃나무’라 부른다. 무궁화, 부용과 같은 아욱과의 접시꽃은 양반가 꽃인 능소화와 대비되는 서민의 꽃이었다. 능소화가 양반가 담장 안에서 고이 피는 꽃이라면 접시꽃은 시골집 문 앞이나 논두렁, 마을 어귀에서 손님을 맞는 꽃이었다. 
 
「먼 옛날 화왕이 천하의 꽃들에게 어화원으로 모이라는 명을 내리자 꽃들이 하나둘씩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옥황상제의 꽃을 가꾸는 꽃감관이 있었다. 화왕의 명에 꽃들은 술렁였다. 마침 꽃감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금매화가 어화원으로 떠나자 망설이던 꽃들도 따라 나섰다. 꽃감관이 돌아왔을 때 산과 들은 텅 비어 있었다. 놀란 꽃감관은 꽃들을 찾아 나섰으나 메아리조차 없었다. 그 때 대문 밖에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접시꽃이었다. 왜 떠나지 않았냐는 말에 "저마저 떠나면 집은 누가 봅니까?” 답했다. 그 때부터 접시꽃은 대문을 지키는 꽃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접시꽃이 어사화라고도 한다. 대개 꽃은 위에서 아래로 피는데, 아래에서 위로 꽃이 피는 접시꽃처럼 벼슬도 차근차근 올라 선정을 베푸는 목민관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로 인해 ‘층층화’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접시꽃의 이미지는 추위를 뚫고 피어나는 매화의 향기도, 나풀거리는 코스모스의 청순가련도, 붉은 장미의 화려함도, 나팔꽃 같은 아침의 영광도, 봄을 맞는 개나리의 발랄함도, 울 밑에 선 봉선화의 애처로움도 아니었다. 다만 대문 앞에서 허리를 곧추 세워 어사화를 쓰고 금의환향하는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환한 얼굴이었다. 이후 시인은 에세이집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2011년)을 냈다. ‘흔들리며 피는 꽃’(1994년)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는다. 긴 문장은 두세 문장으로 끊고 반복어나 접속사 사용을 줄인다. 도입은 간결히 하고, 귀납법을 써 본다. 무엇보다 마지막은 객관적 사실에 주관적 감정으로 채색한, 흔들리며 피는 접시꽃처럼 반전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