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청 돌담에 활짝 핀 능소화... 지금은 흔하지만 예전에는 양반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양반꽃’이었다. 민가에서 기르다가 적발되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능소화는 영춘화, 접시꽃, 무궁화 등과 함께 과거 급제자의 화관에 꽂는 어사화로도 쓰였다. 영어로는 트럼펫처럼 생긴 화관에서 유래한 trumpet creeper이다.

어사화는 왜 꽂았을까? 일설에 의하면 신라의 토테미즘에서 고래는 지상의 왕과 서로 환생한다는 바다의 용왕이었다. 또한 화랑의 모자에 꽂은 꿩의 깃털은 고래가 내뿜는 분무에 의한 무지개를 상징한다. 이러한 신앙을 이어 받은 어사화는 급제자들에게 임금을 대신하여 덕을 베풀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능소화를 민가에서 기르지 못하게 한 것은 아이러니다.
범할 ‘능凌’, 하늘 ‘소霄’의 능소화는 하늘을 범한 꽃이다. 또는 황금색 등나무, 금등화金藤花로도 불렸다. 능소화의 주홍색은 안으로 갈수록 노란색을 띠는 그라데이션 기법의 유화 같은 질감이다. 그 꽃은 담쟁이처럼 뻗은 흡착판으로 벽을 타고 하늘을 오른다. 한 시인은 능소화의 아름다움을 한 줄로 표현한다.
「누가 그렇게 / 하염없이 / 어여뻐도 / 된답니까」
그러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하늘을 범하지 못한 채 통으로 떨어진 능소화는 비애를 품은 꽃이다. 1998년 안동에서 묘를 이장하던 중 미라와 '원이 아빠에게'로 시작되는 '원이 엄마 편지'가 발굴됐다. 조선 양반가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 400여 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임신 중인 아내가 요절한 남편을 떠나 보내는 안타까움이 절절한 편지였다. 남편의 회복을 기원하며 머리카락을 섞어 만든 짚신, 미투리도 있었다. 이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 '400년 전에 부친 편지'라는 부재의 "능소화"(2006년)였다.
「이요신은 응태를 얻었으나 요절할 사주였다. 스님은 누군가 하늘에서 훔쳐 온 소화꽃을 조심하라 말한다. 그 날로 집 안에 모든 소화꽃을 잘라버렸다. 응태도 훌륭하게 자랐다. 스님은 액을 줄이려면 성질 사납고 박복한 처자를 며느리로 들이라고 한다. 중매쟁이는 박색으로 소문난 여늬의 집을 찾았으나 부모는 여늬와 연을 맺으면 죽을 운명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나 중매쟁이의 설득에 혼사를 약속한다. 혼인 날, 여늬는 소문과 달리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결혼 후 처가에 있던 소화꽃을 모두 뽑았지만 여늬의 청으로 한송이를 남겨둔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기억을 못하지만 여늬는 하늘꽃을 훔쳐 달아났고, 하늘정원을 관리하던 팔목수라가 소화꽃 향기를 맡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여늬 대신 사냥을 나갔던 응태와 그의 아들을 앗아간다.」
능소화 꽃가루는 실명을 유발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산림청은 ‘능소화 꽃가루는 표면에 가시나 갈고리 같은 돌기가 있는 형태가 아닌 매끈한 그물망 모양을 하고 있어 바람에 날리기 어렵다. 꽃가루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것은 대부분 풍매화이나 능소화는 충매화로 확인되었다.’라고 발표했다. 과연 그럴까? 매끈한 그물망 모양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리기 어렵다는 것은 논리적 인과 관계가 있는 걸까?
현미경 관찰에 의하면 호박꽃과 같은 충매화 꽃가루는 대개 표면에 뾰족한 돌기가 있어 곤충에 잘 달라붙는다. 반면에 송화 가루는 공기 주머니가 있어 가벼워 바람에 날리는 풍매화다. 만약 능소화 꽃가루가 매끈한 그물망 모양이라면, 오히려 바람에 잘 구르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물망 사이에 곤충의 털이 끼어서 충매화인 걸까?

오래 전, 고향에는 어사화 대신 학위 취득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 그러나 그 영광도 잠시잠간 스치는 바람이다. 기상청 돌담에 핀 것은 머나먼 타향에서 꽃을 피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미국능소화였다. 능소화보다 꽃대가 길고 진한 붉은 색을 띤다.
※ 어사화 : 과거 급제자에게 임금이 내리던 종이꽃. 긴 참대 오리 둘을 비틀어 꼰 그 사이에 보라, 다홍, 노란색의 지화紙花를 끼워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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