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관 옆 빈터에 어지러이 떨어진 검붉은 열매... 오디(mulberry)다. 뽕나무는 오디를 먹으면 소화가 잘되고 방귀가 뽕뽕 나와서, 오디는 열매가 오돌토돌하다는 ‘오들개’에서 유래한다. 뽕밭이 어느 새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뽕나무는 어디서든 쑥쑥 잘 자란다. 뽕잎은 양잠에 필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대농가는 300그루, 중농가는 200그루, 소농가는 100그루를 심게 했다.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뽕밭’은 물레방앗간과 쌍벽을 이루는 로맨스 카페이기도 했다.

1506년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1488~1544)은 반정군이 자신의 집을 에워싸자 올 것이 왔다는 두려움에 자결하려 했다. 단경왕후 신씨는 군사의 말머리가 궁궐을 향한다면 호위하러 왔을 것이라며 말렸다. 그러나 단경왕후는 중종이 즉위한지 7일 만에 폐출되고 말았다. 연산군을 배신할 수 없다며 반정 가담을 거부한 신수근이 그녀의 아버지이자 연산군의 처남이었기 때문이다. 단경왕후는 인왕산 아래에 살았다. 부부 사이가 애틋했던 중종은 단경왕후가 그리울 때 인왕산을 바라봤고, 단경왕후는 붉은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걸어 두었다는 치마바위 전설이 전한다.
1509년 박원종, 1511년 유순정, 1512년 성희안 등 반정을 주도한 3대장이 잇달아 병으로 죽자 중종의 눈에 띈 사람은 조광조였다. 1515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후유증으로 죽고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자 중종은 신하들의 비판을 듣는 ‘구언’을 내렸다. 이에 순창군수 김정 등이 단경왕후를 다시 왕비로 모셔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간들에 의해 유배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국정의 잘잘못을 논할 수 있는 사간원 정원이 된 이틀만에 언로를 열어야 할 대간들이 오히려 구언을 올린 신하들의 죄를 청했다며 그들의 파직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자신의 정치를 펼치려는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 주었고 조광조를 제외한 대간들을 모두 교체해 버렸다.
순식간에 정국의 핵심으로 떠오른 조광조는 문묘 배향이나 군자-소인 논쟁에 뛰어들었고 중종은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1518년 추천된 자들이 국정에 관한 토론을 거쳐 관리를 선발하는 현량과 실시로 훈구파와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합격자 대부분은 사림파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도교와 관련된 제사와 의식을 행하는 소격서 혁파 문제로 중종과 부딪친다. 중종은 선왕들이 소격서를 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에 조광조는 아무리 성군이라도 그것은 실책이며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천자인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주장했다. 골수 사대주의자였던 조광조는 선을 넘었다.
소격서는 폐지되었으나 중종은 유교적 도덕정치를 위해 왕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중종에게 경연에 경연을 강조했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종반정 때 부당하게 공신 작호가 부여된 훈구파의 공훈을 없애야 한다는 위훈삭제를 주장한다. 1519년 마침내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는 뽕나무 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는 파문을 일으킨다.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것으로 ‘走肖’는 ‘조趙’의 파자였다. 파격적인 등장처럼 조광조는 중종의 친위 쿠데타인 기묘사화에 의해 전격적으로 사사되고 말았다.
당시 권력을 잡은 남곤은 평생 후회했다. 1524년 그는 권력지향적인 김안로를 탄핵했다. 1527년 남곤이 세상을 떠나자 김안로는 유배지에서 아들을 통해 누군가 세자의 생일에 불에 탄 쥐(작서)를 세자의 침실 창 바깥에 걸어두었다는 ‘작서의 변’을 일으킨다. 범인은 경빈 박씨와 복성군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1529년 김안로의 아들은 중종의 부마가 되고 그는 예조판서로 복귀한다. 김안로는 잔인하리만큼 정적을 제거했다. 그를 견제해야할 대간들마저 그와 손잡았다.
중종의 세 번째 비 문정왕후는 무려 17년 만에 경원대군을 낳았다. 김안로는 장경왕후가 낳은 세자의 외삼촌 윤임(대윤)과 손잡고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소윤)과 대립했다. 그러나 중종은 문정왕후에게 칼날을 겨눈 김안로를 유배 후 사사시켰다. 반정으로 추대된 중종의 38년 재위 기간은 그야말로 ‘이 일을 어찌할꼬?’의 연속이었던 혼란기였다. 착취의 주체가 바뀌었을뿐 백성들의 삶은 연산군 시대보다 더 피폐해져 갔다.
중종의 마지막을 지킨 이는 대장금이었다. 드라마로 인해 조선 최고 요리사로 각인된 장금은 중종과 30여 년을 함께 한 의녀였다. 의녀제는 태종 당시 어린 여자 10명을 뽑아 3년간 맥경과 침구를 가르친 후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의녀로 나눈 것이 시초다. 장경왕후가 산후병으로 죽자 사헌부는 내의원과 장금을 탄핵한다. 그러나 중종은 원자 생산에 공이 있는 장금에게 상을 내리지 못할망정 형을 가할 수 없다고 한다.
중종의 신뢰 속에 장금은 대장금이라 불리며 어의녀로 임금을 진료하고 처방했다. 중종이 승하하기 전 병의 상태는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는 대장금에 의해 실시간 브리핑되었다. ”대변이 불통한 지가 3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의 증후가 위급하십니다”라는 보고를 끝으로 대장금은 기록에서 사라진다. 대장금의 호칭은 크고 위대하다는 설과 장금이 두 명 이상이어서 키가 크거나 나이가 많은 의녀라는 설이 있다. 또한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쓰인 長은 ‘길’로 읽었기 때문에 大長今은 '큰길금이'로 추정되기도 한다.
중종은 장경왕후의 희릉이 있는 고양시 서삼릉에 묻혔으나, 문정왕후는 지금의 정릉으로 천릉케 하였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능은 태릉에 조성되었다. 지대가 낮은 정릉은 홍수 때 재실까지 물이 차기 때문이었다. 재위 기간 동안 ‘이 일을 어찌할꼬?’의 우유부단했던 중종은 강남 빌딩 숲속에 홀로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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