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사

2-18. 이밥 먹는 나라 - 이팝나무

flower-hong 2024. 10. 22. 10:36

도올 김용옥의 ‘우리는 누구인가?’ 유튜브 강의... 그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설명한 ‘이밥’의 이팝나무를 떠올린다. 이팝나무는 소담스럽게 핀 꽃이 흰 멥쌀(입쌀)로 지은 이밥을 수북하게 담은 고봉밥과 비슷하다는 이밥나무 또는 24절기 중 하나인 입하立夏 무렵에 꽃이 핀다는 입하목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왜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을까? 이밥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민간 어원설이 전한다.
 

이팝나무


 
1371년 신돈의 죽음과 함께 개혁에 실패한 공민왕은 문란한 사생활에 빠져 들었다. 공민왕은 미소년으로 구성된 자제위와 남색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제위를 후궁들과 동침시켰다.

1374년 제주에서는 목호와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게다가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원의 잔당을 친다며 말 2천 필을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목호들은 난을 일으켰다. 2만 5천여 명을 실은 최영 장군의 병선이 제주 앞바다를 새까맣게 메웠다. 고려군은 목호, 몽골인의 피가 섞인 자, 변발한 자 등 닥치는 대로 처벌했다. 제주 인구의 절반이 죽어나갔다.

그 와중에 자제위 홍륜이 후궁을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그를 제거하고 아이를 후사로 삼으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홍륜에 의해 시해되고 말았다. 신돈과 함께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던 이인임은 홍륜 등을 처형하고 공민왕의 뜻이라며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던 모니노를 32대 우왕(1365~1389)을 즉위시켜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10여 년간 국보國父(위인을 높여부를 경우 父를 '보'로 읽는다)로 불리며 섭정한 이인임은 반대파를 가차 없이 숙청했다.

그와 측근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그들은 노비를 풀어서 땅 주인을 물푸레나무水靑木(껍질을 우려내면 물이 파랗게 변한데서 유래한 곤장을 만드는 단단한 나무) 몽둥이로 마구 때려 강제로 땅을 빼앗았다. 사람들은 이를 수정목 공문이라 불렀다. 주인이 토지 문서가 있어도 막무가내였다. 말을 조련하던 우왕이 “수정목 공문을 가져오라. 내가 장차 이 말을 길들이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인임의 수하인 임견미와 염흥방 등이 소유한 땅의 경계는 산과 강이었다.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물푸레나무


1376년 홍산에서 최영에게 패한 후 잠잠했던 왜구는 1380년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금강으로 상륙하여 백성들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고려에는 화포가 있었다. 최무선은 군산 앞바다에서 왜구를 대파했다. 배가 불타자 왜구들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왜구 토벌에 나선 이성계는 황산대첩에서 왜구의 피로 6~7일 동안이 냇물의 핏빛이 가시지 않았다는 대승을 거둔다. 그는 전주에 들러 종친들과 지역 토호들을 모은 자리에서 한고조 유방이 지은 '큰 바람이 불어 구름을 흩날린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포부를 드러냈다.

1388년 이인임 일당의 탐욕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로 그들을 축출하는 무진피화로 권문세족을 쓸어 버렸다. 그러나 권문세족 출신인 최영은 급진 개혁을 꿈꾸는 이성계와는 달리 온건 개혁을 지지했다. 우왕은 최영의 딸을 비로 맞이하고 그에게 전권을 맡겼다. 이 무렵, 명의 주원장은 원이 지배했던 철령 이북을 요구했다. 최영은 오히려 요동은 원래 고려의 영토라며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

이성계는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과 둘째,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 왜구가 쳐들어올 수 있고 넷째, 장마철에 아교가 녹아 활이 풀어지고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는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목호의 난으로 한을 품은 제주인의 원혼이 지켜보고 있었을까? 우왕은 선왕의 시해 당한 것은 최영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최영의 출진을 막았다. 

1388년 결국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제거하였다. 우왕은 환관 80여 명을 이끌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습격했으나 그들이 군영에 있어 실패하고 강화에 유배되었다. 조민수에 의해 옹립된 33대 창왕(1380~1389)은 명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과 거짓을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34대 공양왕(1345~1394)을 즉위시켰다. 권력의 시계추는 이성계를 향하고 있었다. 
 

이팝나무

 

고려 말, 당시 권문세족들은 불법으로 땅을 늘리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을 위조하는 등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경제는 파탄지경이었다. 1391년 이성계는 국가 소유의 모든 땅을 환수 조치했다. 그리고 경기 지역의 땅에 대해서만 수조권을 전·현직 관료, 특히 신진사대부들에게 재분배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세금은 생산량의 1/10로 줄었다. 이밥은 이성계 덕분에 먹을 수 있게 된 흰 쌀밥이었다. 이팝나무는 은행나무, 양버즘나무, 느티나무, 벚나무와 함께 대표적인 가로수다. 여름이 오는 길목 도심 곳곳에 활짝 핀 이팝나무는 그야말로 이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