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사

2-17. 붓뚜껍 신화 - 목화

flower-hong 2024. 10. 19. 19:13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도 막상 만나면 ‘아! 이 꽃이?’ 다시 바라보는 꽃들이 있다. 목화가 그러했다. 아! 이 꽃이 문익점이 붓 뚜껑에 씨앗을 숨겨서 들여 왔다는 목화인가? 그 따스함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나무에 핀 꽃, 목화木花’라 했을까?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시기는 원의 고려 간섭기가 끝나가던 원·명교체기였다.
 

목화


1297년 모친 제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원에서 돌아온 세자는 충렬왕의 후궁들과 측근들을 모조리 죽인 후 양위를 받아 즉위한다. 26대 충선왕(1275~1325)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개혁하려 했지만 권문세족의 반발과 아내인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8개월 만에 폐위되어 원으로 소환된다.

1307년 충렬왕이 죽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무늬만 고려왕일뿐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로 원의 심왕으로 봉해진 실질적 몽골인이었다. 2개월 후 몽골로 돌아가 원격 통치를 했던 충선왕은 신하들이 귀국을 간청하자 27대 충숙왕(1294~1339)에게 양위하고 심양에 학술기관 만권당을 세웠다. 이곳을 통해 성리학이 유입되었고 충선왕의 지원으로 신진사대부들의 입지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이 있는 상황에서 충숙왕의 입지는 불안했다. 게다가 충선왕은 심왕의 작위를 이복형의 차남 왕고에게 물려주었고, 충숙왕은 왕고의 모함으로 원에 소환과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1330년 심왕과의 알력이 계속되자 충숙왕은 고려 최악의 폭군인 28대 충혜왕(1315~1344)에게 양위해 버린다.

세자 시절, 사찰 지붕 위의 새를 잡기 위해 불지르고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던 충혜왕의 막장 짓에 원나라는 충숙왕을 복위시켰으나 정사에 뜻을 잃은 그는 사냥과 음주가무로 소일하다가 붕어했다. 8세에 즉위한 29대 충목왕(1337~1348)은 요절하고, 이복동생인 30대 충정왕(1337~1352)이 즉위한다. 그러나 환관과 외척, 기철의 전횡, 왜구의 침입 등 내우외환이 잇따르자 1351년 조정은 어린 충정왕 대신 충숙왕의 3남인 31대 공민왕(1330~1374)을 왕으로 원에 요청한다. 

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공민왕은 원이 내분과 홍건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 반원자주정책을 펴 나갔다. 몽골식 복장과 변발을 금지하고 정동행성을 폐지했다. 또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이 시기에 신진사대부가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올랐다. 1361년 최영과 이성계는 원에 쫓겨 고려로 침입한 홍건적을 격파했다.
 
1364년 원은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처형되자 원에 머물던 충선왕의 서자이자 공민왕의 삼촌인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옹립한다. 이 시기에 원에 도착한 문익점을 포함한 사신단은 덕흥군을 지지했으나 그는 최영에게 패하고 말았다. 문익점은 그 와중에 목화씨를 갖고 돌아와 파직된 후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 재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분신같던 노국대장공주가 결혼 14년 만에 임신한 아이를 출산하던 중 죽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봉황이 먹는 열매가 열린 벽오동


이때 등장한 이가 신돈이다. 1365년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로 삼고 개혁을 단행했다. 신돈은 최영을 좌천시켜 병권을 장악하고 전민변정도감을 부활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강제로 노비가 된 사람들에게 땅과 신분을 찾아 주었다. 그는 살아있는 부처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차츰 권력에 취한 신돈의 사생활이 도마에 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토지를 몰수하거나 죽였다. 그는 실의에 빠진 공민왕에게 자신의 첩이자 종이었던 반야를 바쳤다. 야사에 의하면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를 닮은 반야를 총애했으며 우왕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권문세족들의 반발과 모함에 공민왕은 신돈에 대한 신뢰를 거두기 시작했다. 신돈에게는 지지세력이 없었다. 1371년 결국 그가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에 신돈 천하는 6년 만에 막을 내렸다. 공민왕의 개혁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 아쉬움이었을까? 신돈이 죽자 그와 남긴 물건이 쇠붙이만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불가살이不可殺伊 혹은 불로 죽일 수 있다는 불가살火可殺 전설이 널리 퍼져 나갔다.
 

오동나무, 개오동


신돈과 여수 오동도 전설도 전한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오동도는 오동나무가 많은 섬이었다. 그런데 전국의 풍수를 살피던 신돈은 오동도에 들어섰을 때 한 줄기의 빛이 홀연히 숲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봉황이었다. 그는 공민왕에게 오동도에 봉황이 드나드는 것은 전라도에서 왕이 나올 징조이니, 전라도의 ‘전’을 사람 ‘인人’이 아닌 들 ‘입入’의 ‘전全’으로 바꾸고 봉황이 먹는 오동 열매가 나지 않도록 오동나무를 베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다. 신돈의 천기누설이 독이 된 걸까? 고려는 오동나무를 베어냈으나 결국 전주全州 이씨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