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사

2-16. 충충충... - 피뿌리풀

flower-hong 2024. 10. 13. 18:51

몽골에서 뿌리가 피처럼 붉다는 피뿌리풀을 만났다. 독성이 있어 양이나 말이 먹지 않기 때문에 몽골에서는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지만 제주에서는 간혹 보이는 멸종위기종이다. 한반도를 건너 뛴 몽골과 제주의 피뿌리풀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몽골에서 만난 피뿌리풀 (2018년)


1235년 고려를 공격한 몽골은 4년간 전국을 휩쓴 후 1239년에 고종의 몽골 입조를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1251년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완성했다. 원래 대장경은 993년과 1010년에 현종(992~1031)이 불심으로 거란을 물리치고자 제작한 초조대장경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에 의해 소실되자 최우 무신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대몽항쟁을 이어 가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다시 새긴 것이다. 대장경판에 쓰인 나무는 재질이 균일하고 적당히 물러서 글자를 새기는데 안성맞춤인 산벚나무였다.

1253년 고종이 입조하지 않자 몽골은 6차 침입하였고, 고려는 왕자를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1254년 몽골은 재차 고종의 입조를 요구하며 7차로 침입하였다. 이때 20만이 넘는 포로가 잡혀 갔고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이후로도 몽골은 계속 고종의 입조를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강경노선을 견지하던 최씨 무신정권은 최우를 이은 최항과 최의의 폭정으로 김준에 의해 무너졌다.
 
1259년 태자였던 24대 원종(1219~1274)이 30여 간의 전쟁을 끝내는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의 몽케 칸을 만나러 향하던 중에 칸이 사망한다. 그리고 태자는 훗날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쿠빌라이를 찾아가 6개의 조건을 내세우며 항복 의사를 밝혔다. 이에 쿠빌라이는 ‘고려는 당태종도 항복시키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나라의 태자가 제 발로 찾아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크게 환대한다. 당시 동생 아릭부케와 후계 자리를 놓고 치열한 내전 중이었던 쿠빌라이는 이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세를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60년 쿠빌라이가 칸이 된다. 원종의 선택은 신의 한수였다.
 
곧이어 고려의 고종이 승하하자 쿠빌라이는 원종을 귀국시키며 다른 나라와는 달리 ‘의관은 고려의 풍속을 좇아 상하 모두 고치지 말고, 개경 환도 시기는 고려의 형편대로 하라’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했다. 이후 원종은 개경 환도를 추진했으나 무신정권을 이끌던 김준 등이 반대하자 그의 부하였던 임연을 회유하여 제거한다. 그러나 대몽 강경론자인 임연은 원종을 폐위시켜 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압력에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킨다. 얼마 후 임연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피살되자 원종은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100여 년의 무신정권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대몽 항쟁을 주도했던 삼별초는 끝까지 환도를 반대했다. 최우가 권력 유지를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시작된 삼별초는 좌별초와 우별초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몽골에 포로로 잡혔던 신의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원종이 해산을 명하자 배중손은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천여 척의 배에 만오 천명을 이끌고 진도 용장성으로 옮겨 항쟁을 전개한다. 원종은 원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1271년 배중손이 전사하자 김통정은 제주로 옮겨 항전을 이어 간다. 1273년 삼별초는 김방경 장군과 몽골의 홍다구의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몽골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말을 방목했다. 몽골의 목축 기술과 제주의 목초지가 만난 목마장은 대성공이었다. 원은 목장을 관리하는 목호를 파견했다. 원이 탐라를 지배하는 동안 제주 인구는 1만에서 3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목호는 1,700여 명에 달했다. 당시 몽골 말의 어딘가에 붙어온 피뿌리풀은 제주에 피를 뿌리며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선물받은 제주 피뿌리풀 액자


고려는 개경 환도 후 100여 년 동안 원의 간섭하에 놓인다. 1271년 쿠빌라이는 원을 배후로 왕권을 보장받으려는 원종의 청으로 태자 왕심을 몽골에서 제국대장공주와 혼인시켰다. 곧이어 원종이 승하하자 귀국한 25대 충렬왕(1236~1308)은 왕권 강화를 위해 변발 등의 몽골풍을 받아들였다. 이후 왕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고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의 ‘충忠’ 자를 붙인 시호가 주어졌던 것이다.

작약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의 사람이었다. 1297년 충렬왕을 지팡이로 때릴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던 제국대장공주는 원나라에서 아들의 혼례를 마치고 돌아온 후 작약을 만지작거리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적셨다. 그리고 얼마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약은 우리나라와 중국, 몽골 등에서 자란다. 중국에서 작약은 작별할 때 꺾어주는 이별의 꽃이자, '작芍'은 약約과 발음이 비슷한 약속의 꽃이다. 제국대장공주에게 작약은 작별이었을까?  돌아가겠다는 약속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