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일상

3-04. 채식주의자

flower-hong 2024. 10. 17. 12:39

삐리리~ 아버지 전화다. 41년생, 여든 넷이신 아버지 전화는 늘 나를 긴장시킨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지난 9월, 벌초하러 갔을 때는 제주시에서 형을 만나고 천천히 간다고 전화했는데 넘어져서 119를 불렀다는 말에 부랴부랴 서둘러 내려 가기도 했다.

"예~ 아버지. 무사마씸?"
"어디, 학교가?"
"예."
"물어볼 말이 이신디, 채식주의자가 머꼬?"

예전에 천 권을 읽으면 인생이 바뀐다기에 각 잡고 독서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 만시간의 법칙, 당신의 소중한 꿈을 이루는 보물지도,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장길산, 임꺽정, 토지, 혼불, 개미, 1Q84, 너와 나의 1cm... 일 년에 백 권 이상 읽었던 그때였다. 그 중에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공계 출신의 내게는 난해한 채식주의자도 있었다.

"고기 대신에 주로 채소나 과일만 먹는 사람들 마씸~"
"건강 때문에 겅햄서?"
"꼭 그런 건 아니고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머 미안함? 환경 보호 그런 거 때문 마씸"
"기가? 아무튼 한강이 대단허다이~"

젊은 날의 아버지는 한때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나 가난의 굴레를 짊어진 시골청년에게는 생계가 벅찼다. 병석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등학생인 동생...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하루종일 섶나무(잎나무, 풋나무, 물거리 등의 땔나무)를 모아서 팔았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함께 화제의 중심에 선 사람은 소설가 한승원이었다. 한강의 아버지인 그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한국 문단의 거장이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제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 강수연 주연)'는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건강의 30%는 선천적으로, 70%는 할 나름이라는 말처럼 사람의 성품과 기질도 그렇게 타고 난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는 책을 많이 사주셨다. 한국위인전, 세계위인전, 어린이동화, 한국문학 50권 전집, 세로로 씌여있어 한 페이지 넘기는 데 10분 걸렸던 한국사 이야기...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걸까? 사실적 글쓰기였지만 '웰컴 투 더 마이크로월드', '와우! 현미경 속 놀라운 세상', '118원소의 LIVE 케미스토리'에 이어 나름 숲의 인문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화학자 홍교수의 식물 탐구 생활 - 나무편과 풀꽃편' 두 권을 출간했다. 원고를 받아보신 출판사 대표님이 화학 전공이신데 글을 이렇게 재미 있게 쓰셨냐며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잘 팔려야 계속 이어질 텐데...

영어교사였던 엄마를 닮은 딸도 영어교사다. 그런데 트럼펫 전공의 아들은 누굴 닮았을까? 어머니는 손자가 트럼펫을 분다는 말에 "우리 집안에 그런 우던(친족의 제주 사투리)이 어신디 누게 닮아시?" 갸우뚱했다. 혹시 나도 모르는 그런 기질이 내게도 있는 걸까?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한강의 아버지도 소설가란다."
"그래?"
"미안하다. 아빠가 진즉에 트럼펫을 불었어야 하는데~"
"괜찮아. 아빠~ 내가 나중에 잘 만들어 볼께."

아들은 고등학교 때 엄마를 만나 10년만에 결혼한 아빠처럼 고등학교 때 음악하는 여친을 만나 7년째 열애 중이다. 딸도 대학원생인 아빠에 노심초사했던 그 옛날 엄마처럼 대학원생을 만나고 있다.

'3.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3. 정교수  (0) 2024.10.12
3-02. 3대 가곡  (13) 2024.10.03
3-01. 벌초  (3) 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