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흘산으로 향한다. 주인 ‘주主’와 우뚝 솟을 ‘흘屹’의 주흘산은 ‘주인처럼 우뚝 솟은 의연한 산’으로 문경새재의 주산이다. 화창한 날씨지만 산은 아직 때가 이른가? 생강나무꽃, 제비꽃 외에는 앙상한 나무들뿐이다. 그 사이로 진달래가 드문드문 꽃을 피웠다. 진달래는 '진짜 달래'라는 뜻이다. 한자어는 꽃에 있는 반점이 두견새(접동새)의 목에 있는 얼룩무늬와 닮았다는 두견화杜鵑花다.

「사람을 사랑해 인간 세계로 내려온 천신 두우... 그는 촉나라의 망제望帝가 되었지만 위나라에 패한 후 복위를 꿈꾸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만다. 두견새로 태어난 두우... 촉나라로 돌아가겠다고 ‘귀촉귀촉’ 밤낮 울어대며 토한 피가 하얀 진달래를 붉게 물들이면서 두견화로 불리게 되었다.」
천신 두우 못지않게 진달래에 피를 토한 사람은 조선만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1705~1777)였다. 진달래를 처절한 망제의 피눈물이라는 시를 읊을 정도로 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그였다.
「기억하라! 한이 한번 맺히면 / 영원토록 마멸되지 않음을 /
파산만리 붉은 빛은 / 망제 천 년의 피눈물임을!」
원교가 열아홉이 되던 해였다.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등극하면서 소론이었던 가문이 역적으로 몰리자 출사를 포기하고 명필로 명성을 떨친다. 그러던 50세에 ‘형(경종)을 죽이고 왕이 된 역적, 영조’라는 대자보가 객사에 걸리는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는다. 그 때 원교는 왕족의 후예이자 예술적 천품이 참작되어 유형에 처해지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아내는 처마에 목을 맨 후였다. 그는 완도 신지도에서 23년간 유배 끝에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유배지에서 희노애락을 글씨에 담아낸 원교의 동국진체는 민족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18세기 조선을 풍미한 글씨체였다. 그가 조선 고유의 서체 형성 과정과 이론을 기록한 “서결(1764년)”은 당대 최고의 서예 지침서였다. 그의 서체에 얽힌 추사와의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온다.
제주로 유배 가던 중 해남 대흥사에 도착한 추사... 그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 편액을 보고 초의선사에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조선의 글씨를 망친 원교의 현판을 버젓이 걸고 있냐고 힐난했다. 그리고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을 써 준다. 9년의 유배가 풀리고 돌아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른 추사... 그때는 자신이 원교의 글씨를 잘못 보았다며 다시 걸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유배에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추사를 높이기 위해 과장된 것일 뿐 유배 길에 그런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도 한다.
서예, 그림, 시, 문장, 고증학, 금석학, 다도, 불교학 등을 섭렵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추사는 원교를 조선의 글씨를 망친 인물로 비판했다. 그는 원교가 붓을 뉘어서 쓰는 언필의 병폐를 지적하자 서예가가 붓을 탓한다며 붓 잡는 법과 먹 쓰는 법도 모른다고 그를 디스했다. 일찍이 청나라의 신문물을 받아들인 추사에게 원교의 개성이 담긴 동국진체는 이해할 수 없는 글씨체였던 것이다. 이후 원교는 사후마저 주자학의 격조를 중시하는 추사체에 가려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간 파산 만리 붉은 빛이었다.
두견화의 한을 품고 살았던 원교 이광사... 관목인 진달래는 조선 중후기에 산의 개간과 땔감 사용이 증가하면서 봄에 산을 가득 채우는 꽃이 되었다. 개꽃 철쭉과 달리 진달래꽃은 생으로 혹은 꽃전이나 술과 차로 먹을 수 있어 참꽃眞花으로도 불렸다. 하산 길... 진달래 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의 역광에 비추인 분홍빛 진달래가 그리 맑고 예뻐 보일 수가 없다.
※ 허니가이드honey guide : 꿀이 분비되는 부분이 눈에 띄도록 유도하는 여러 가지 점, 선, 독특한 무늬, 색으로 곤충에게 활주로와 같은 역할을 한다.
※ 파산 : 중국 쓰촨성의 바산
※ 귀촉귀촉 : 우리나라에서는 접동 접동으로 들린다하여 접동새로 불렸다.
※ 이규상의 "병세재언록"은 원교가 하늘을 향해 ‘내게 뛰어난 글씨 솜씨가 있으니 목숨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통곡했고, 이를 불쌍하게 여긴 영조가 살려주었다”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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