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연은초 텃밭에서 만난 삼지창 같은 줄기 사이로 주먹만한 수박이 달렸다. 수박은 물 '수水'일 것 같지만 슈박에서 유래한 순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서역(서쪽)에서 전해진 오이'라는 뜻의 서과西瓜다. 호박은 오랑캐胡에서 들어온 박이라는 뜻으로, 한자어는 남쪽(남만)에서 전해진 오이라는 남과南瓜다.

수박을 우리나라에 전래한 사람은 몽골 침입 당시 길잡이를 한 홍다구다. 허균은 팔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를 소개한 '도문대작'에서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에 귀화해 고려 사람을 괴롭힌 홍다구가 처음으로 개성에 수박을 심었다'라고 기록한다.
몽골의 침입에 고려는 치열하게 저항했다. 1232년 제2차 여몽전쟁 당시 처인성 전투에서는 적장 살리타이가 김윤후 장군의 화살에 죽자 혼란에 빠자 몽골은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배신자도 있었다. 홍다구 일가였다. 그의 아버지 홍복원은 살리타이의 앞잡이를 자청했다가 몽골로 귀화했으며, 몽골에서 태어난 홍다구는 몽골의 지휘관으로 승화후 온을 죽여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고 김방경 장군과 함께 일본 원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고려에 온갖 행패를 부렸다.
사람들은 홍다구가 심은 수박을 배신자가 가져온 과일이라며 외면했다. 그러나 수박은 점차 귀한 과일로 변해 갔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주방을 맡는 내시 한문직이 수박을 도둑질한 죄로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갔으며, 선조실록에는 수박을 철저히 관리하지 못한 관리를 엄하게 문책하기도 했다.
반면에 미국에서 수박은 치킨(특히 닭다리), 쿨에이드와 함께 대표적인 인종차별적 음식이었다. 흑인들이 그나마 마음껏 먹을 수 있던 것은 주인이 먹다 남긴 닭다리와 닭날개를 면실유에 튀긴 프라이드치킨과, 백인은 거들떠 보지 않던 수박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격이 싸고 맛도 좋아 저소득층이 많이 찾는 과일이다.
왜 수박 껍질은 초록색일까? 식물의 색소에는 초록색의 엽록소, 주황색의 카르티노이드 색소, 붉은 색의 안토시아닌 색소 등이 있는데 수박 껍질에는 엽록소가 다른 색소보다 많기 때문이다. 수박 내부에는 라이코펜 때문에 붉은 빛을 띈다. 또한 수박에는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체내 열을 낮춰주고 단백질 분해를 도와 소변 배설을 촉진시키는 시트룰린이 많아 이뇨 작용을 촉진한다.
수박을 그린 화가는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였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녀는 17세에 큰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쳐 수술과 치료를 반복했으며, 말년에는 다리까지 절단해야 했다. 1954년 그녀는 죽기 8일 전에 파랗고 하얀 하늘을 배경으로 그린 수박에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를 쓰고 평생을 사랑한 바람둥이 남편 디에고 리베라에게 은혼 기념 반지와 함께 선물했다.

멕시코에서 수박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매년 11월의 첫째 날과 이튿날은 ‘죽은 자들의 날The Day of The Dead’로기념하는데, 가족들은 다함께 모여 축제로 죽은 친구와 가족을 추모한다. 이때 제단에 고인을 기리는 메리골드 꽃 장식과 함께 반드시 올라가는 것이 수박이었다. 수박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그 씨앗은 불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과즙이 가득한 수박은,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가려 했던 칼로의 내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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