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꽃나무에서 만난 한국사_완료

41. 꽃미남의 운명 - 삼지구엽초

flower-hong 2025. 1. 10. 08:32

매발톱 모양의 특이한 꽃... 남성은 정력에, 여성에게는 갱년기에 좋다는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다. 세 개의 가지마다 달린 세 장의 잎에서 유래하며 하루에 수차례 교미로 기를 소진한 양이 먹자마자 원기가 회복되었다는 풀이다. 이를 본 노인이 삼지구엽초를 먹고 아들을 낳았다고 할 정도다. 한자어는 음란한 양淫羊이 먹는 콩잎藿 같은 풀, 음양곽 또는 노인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버린다는 방장초放杖草다. 
 

삼지구엽초


1834년 조선의 왕 중 최연소로 여덟 살의 헌종(1827~1849)이 즉위하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삼정의 문란과 신분 질서가 붕괴되던 때였다. 또한 순원왕후의 동생 김좌근의 안동 김씨와 어머니 신정왕후(조대비)의 아버지 조만영을 중심으로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열리고 있었다. 42세에 과거 급제한 김좌근이 4년만에 이조판서까지 오를 정도였다.

정순왕후 사후 안동 김씨와 노론 시파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다. 1836년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등 신자들이 증가했다. 그러나 풍양 조씨의 등장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순원왕후의 척사윤음이 반포되고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감시하는 오가작통법으로 천주교 신자를 색출해 냈다. 프랑스 신부들을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되고 처형된 기해박해(1839년)였다. 이들 중에는 안동 김씨들도 있었다. 

1841년 15세에 친정을 시작한 헌종은 정조를 닮으려 노력했다. 헌종은 풍양 조씨 세력으로 안동 김씨를 견제하면서 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병조판서를 독자적으로 임명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장용영과 같은 친위대인 총융청을 설치하였다. 이는 안동 김씨가 장악한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직접 지휘할 새 군영을 만든 것이었다. 또한 초계문신을 선발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회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의 주동자가 몰락 양반일 정도로 왕의 권위가 바닥을 치던 시기였다.

1843년 효현왕후가 요절하자 효정왕후를 맞이했으나 3년 만에 순원왕후는 중전의 병을 이유로 후궁 간택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경빈 김씨를 맞는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주인공이 바로 헌종이었다. 헌종은 창덕궁에 낙선재를 지어 자신의 거처로 삼고 옆에 경빈을 위해 복福을 내리는 집, 석복헌을 지었다. 이 역시 정조가 수빈 박씨의 처소를 가까이 두어 순조를 낳은 것을 따른 것이었다. 낙선재는 순 임금이 선善을 즐거워하고 화려함을 쫓지 않고자 한 뜻을 담아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미남 왕으로 기록된 헌종은 후사에 대한 강박감에 녹용, 당귀와 같은 정력제를 꾸준히 복용했다. 녹용을 달인 한약만도 천첩 이상이었다. 그러나 헌종은 소화 불량과 부종이 심해지면서 23세에 승하하고 말았다. 과다 복용한 한약이 간에 독이 된 것이다. 헌종의 친정으로 위기를 맞았던 안동 김씨는 부활했다.

헌종은 서화와 전각 애호가였다. 전각은 나무, 돌, 옥 등에 전서체를 새겨 인장을 만드는 것이다. 19세기 조선은 청의 영향으로 고증학, 금석학과 전각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가 수집한 인장에는 ‘좋은 붓과 벼루는 인생의 첫 번째 기쁨이다(필연정량인생일락筆硯精良人生一樂)’라는 글귀와, 2014년 오바마 대통령 방한 당시 반환된 국새와 왕실 인장 중에는 천하의 선비들과 벗한다는 헌종의 인장 우천하사友天下士도 있었다. 그러나 일국의 군주로 궁궐 안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야 했던 그였다.

각종 정력제를 복용했던 헌종... 그 중에는 삼지구엽초나 복분자, 하수오, 오미자, 구기자, 산마, 산수유, 부추, 야관문(비수리), 가시오갈피 등 정력에 좋다는 약초도 있었을까? 그러나 현대 정력제의 원조인 비아그라의 원리를 발견한 이그나로 교수는 64세에 마라톤을 시작해서 풀코스를 완주했다. 심박수를 증진시키는 유산소 운동이 건강을 지키는 천연 비아그라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효장세자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5남, 정조는 문효세자와 순조, 순조는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헌종을 낳았다. 그러나 효장, 문효, 효명세자는 요절하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 영조 대부터 적자로 이어지던 왕위는 헌종에서 단절되고 말았다. 남은 혈통은 사도세자의 후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