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K-culture의 시작 - 닥나무
얼룩말처럼 껍질에 줄무늬가 선명한 나무들... 양버즘나무 같은 동그란 열매가 차츰 딸기처럼 빨갛게 익어가는 꾸지나무다. 꾸지나무는 한지를 만든다는 구지構紙에서 유래한다. 한지하면 닥나무지만 꾸지나무도 그에 못지않게 많이 쓰인 나무였다.

수 차례 거란을 물리친 고려는 덕종 대부터 여진, 탐라, 일본의 호족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면서 송나라, 거란과 대등한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군림한다. 이복형 덕종과 정종을 이어 11대 문종(1019~1083)이 즉위한다. 이들 셋은 고려-거란 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른 현종을 유일하게 받아준 공주 귀족 김은부의 딸들이 낳은 왕이었다. 문종은 최충과 함께 협상과 조정을 통한 문치 정책을 펴 나갔다. 해동공자라는 최충은 구재학당이라는 문헌공도를 설립해 유학 보급에 힘썼으며,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은 11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최충의 유학과 의천의 불교가 어우러진 고려는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문화 전성기를 맞이한다.

고려는 예성강 벽란도에서 송나라에 인삼, 나전칠기, 모시, 자기, 한지 등을 수출하고 비단, 서적, 약재 등을 수입했다. 이슬람 상인들에 의해 코리아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닥나무가 있었다.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을 만든 한지는 하얀 종이라는 백추지 혹은 거울처럼 빛난다는 경면지로 불렸다. 한지를 만들려면 닥나무 죽을 접착시킬 재료가 필요했다. 그것은 무궁화, 접시꽃과 같은 아욱과에 속하는 닥풀의 뿌리에서 나는 점액이었다. 닥풀이라는 이름도 한지를 만들 때 호료로 사용한데서 유래하며, 립스틱 모양의 딱풀은 ‘딱’ 붙어서가 아니라 닥풀의 된 발음이다.
12세기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이 강성해지기 시작한다. 1104년 15대 숙종(1054~1105)은 윤관 장군의 건의로 보병(신보군)에 기병(신기군), 승병(항마군), 노비(연호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편성한다. 16대 예종(1079~1122) 당시 윤관 장군은 여진 정벌에 나서 동북 9성을 쌓았으나 여진이 대대손손 고려를 섬기겠다며 반환을 요청하자 재정 부족 등의 이유로 넘겨주고 말았다.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은 불과 10여 년 만에 요를 멸망시키고 송을 공격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여 고려에 사대를 요구했다. 16대 예종과 17대 인종(1109~1146)의 장인이었던 실권자 이자겸은 권력 유지와 금의 힘에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는 인종이 그에게 양위를 고려할 정도로 강력한 외척이었다. 이자겸은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공을 세웠던 심복 척준경과 정사를 처리했다. 1127년 인종은 척준경을 회유하여 이자겸을 처단한다. 척준경 역시 토사구팽 당해 유배된다.

당시 고려는 건국과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정계를 장악한 귀족들이 과거와 음서제로 관직을 독점하면서 형성된 문벌 귀족의 세상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궁궐이 불타는 등 민심이 흉흉하자 묘청은 칭제건원稱帝建元, 즉 내부에서만 쓰던 황제 칭호를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쓸 것을 주장했다. 또한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항복하고 주변 나라가 조공할 것이라는 풍수지리설을 주장했다. 이에 인종은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토착신을 섬기는 팔성당을 설치한다. 그러나 도교에 빠진 송나라가 허무하게 금에게 멸망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김부식은 유교 이념의 사회 질서를 확립을 주장하며 서경 천도를 반대했다. 1135년 결국 묘청은 서경에 대위국을 세우고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의 개경파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김부식은 신라 계승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정사로 인정하지 않았던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1929년)”에서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했다.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나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은 무슨 사건에 원인하는 것인가... 나는 한마디로 회답하기를 서경 천도 운동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그 실상은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함으로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김부식의 개경파는 문신 중심의 문벌 귀족 체제를 굳혀 나갔다. 1145년 인종은 전국에 닥나무를 재배하라는 명을 내렸다. 고려는 유교 경전과 불경에 대한 수요 증가로 많은 양의 종이가 필요했다. 그리고 한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18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한 기록 문화를 낳았다. K-culture의 시작은 한지에 기록된 우리 역사다.
그러나 현종 이후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태평성대는 인종 대에 종말을 고하고 문벌 귀족 사회에서 쌓인 불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고려는 18대 의종(1127~1173) 때부터 쇠락의 길로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