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계절 풀꽃나무_3

05. 바람불어 좋은 매발톱과 얼레지

flower-hong 2025. 3. 29. 13:28

아파트 화단에 핀 보라색 매발톱... 꽃이 매의 발톱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디가 닮은 걸까? 며칠 후, 다시 화단을 찾았다. 꽃잎이 지기 전에 고개를 숙인 모습에서 그보다 더 매발톱을 닮을 수 없는 굽은 꿀주머니, 꽃불(거距)을 보았다. 라틴명 아퀼레기아Aquilegia도 '독수리 같은'이라는 아퀼눔aquilnum에서 유래한다. 
 
매발톱꽃은 보라색, 흰색, 붉은색을 띤다. 열매는 비타민C가 풍부해서 신경쇠약, 괴혈병 및 간장질환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매발톱을 포함한 미나리아재빗과 식물들은 대부분 독성이 있다. 매발톱은 자가수분보다 타가수분을 좋아해서 중국에서는 ‘매춘화賣春花’, 우리나라에서는 ‘바람꽃’으로 불린다.
 

매발톱



바람꽃, 매발톱의 단짝은 얼레지다. 오래 전, 남해 금산에서 만났던 얼레지는 꽃에 관심이 없던 그 때에도 시선을 사로잡는 꽃이었다. 주로 산기슭에 집단으로 자생하며 25도 이상이 되면 마치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린 것처럼 꽃잎을 살포시 올려 젖힌다. 그래서일까?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다. 얼레지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대신에 꽃잎에 있는 무늬로 곤충을 유혹한다. 
 

얼레지



얼레지는 ‘엘레지élégie’ 혹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곡 ‘엘리제를 위하여(1810년)’와 연관된 외래어 같지만, 잎에 피부병인 어루러기처럼 ‘얼룩덜룩한’ 자주색 무늬에서 유래한 우리말이다. 얼룩무늬는 먹이가 부족한 이른 봄에 남들보다 먼저 돋아난 잎을 초식동물로부터 감추기 위해 낙엽처럼 위장한 보호색이다. 얼레지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얼룩 무늬가 사라지고 녹색을 띈다. 얼레지는 첫해에 씨앗이 발아하여 꽃대가 형성된 후 다음 해에 이파리 한 장이, 그 다음 해에 또 한 장이 나오며 땅속의 알뿌리 영양분이 충분해져 꽃을 피우기까지 5년이 걸린다. 녹말이 많은 얼레지 뿌리는 구황식물로 쓰였으며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물자가 부족하자 얼레지 뿌리로 국수를 만들기도 했다.  

엘레지는 슬픈 시와 같은 문학 장르였으나 지금은 슬픈 노래, ‘비가悲歌’로 번역된다. 이러한 정서의 음악을 엘레지라 한다. 동백아가씨(1964년)를 비롯한 애수에 찬 노래를 부른 가수 이미자(1941~)의 애칭이 ‘엘레지의 여왕’이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또한 엘레지는 ‘개의 자지’라는 뜻의 생소한 순우리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대 교수였던 오탁번(1943~) 시인조차도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를 몰랐다고 자책한다.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를 다 알지? / "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 /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서울 아파트 화단의 매발톱과 남해 금산의 얼레지다. 시공간을 뛰어 넘어 바람부는 날 서로 그리운 바람꽃과 바람난 여인이 되어 견우와 직녀처럼 만났다. 한참 후, 강릉솔향수목원에서 줄기의 잎 밑에 난 가시가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운 매발톱나무도 만났다.
 

매발톱나무



※ 꽃불은 제비꽃이나 물봉선화 등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