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wer-hong 2025. 6. 30. 22:09

캄보디아 여행 중에 만난 부겐빌레아Bougainvillea... 포인세티아가 멕시코 주재 미국대사 포인세트에서 유래한 것처럼 식물학자 코메르송(1727~1773)이 프랑스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탐험가 루이-앙투안 드 부갱빌 제독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식물원 온실에서나 볼 수 있다.

부겐빌레아는 포엽의 모양이나 질감이 종이 공예로 만든 것 같아 종이꽃Paperflower으로도 불린다. 3장의 포엽이 수술처럼 보이는 작은 꽃 3개를 감싸고 있으며 Purple Queen이라는 별칭도 있지만, 다양한 색깔로 개량되었다.
 


1766년 루이 15세는 부갱빌이 이끄는 세계 일주 원정을 승인했다. 그는 새로운 국가의 내륙과 해안의 식물을 조사하고 표본을 만들기 위해 식물학자 코메르송을 고용했다. 코메르송은 연인이었던 잔느 바레를 동행하려 했으나 당시 여성은 선박에 탑승할 수 없었다.

“저도 가고 싶어요!”
“여자는 항해를 할 수 없어!”
“제가 최초가 되면 안 되나요?”
 
고민하던 둘은 잔느 바레의 머리를 짧게 깎고 남자로 위장했다. 이름도 잔느Jeanne에서 장Jean 바레로 고쳤다. 부갱빌이 쓴 “세계여행기”(1771년)에 따르면, 그녀의 엄청난 체력과 활동에 누구도 여자로 의심하지 않았다. 항해 중 코메르송의 건강이 악화되자 식물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녀는 식물 탐사의 실질적 책임자로 2년 동안 무려 6,000개 이상의 표본을 수집했다. 그 중에 부겐빌레아도 있었던 것이다.

여성 탐험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당찬 여자들, 세계의 끝으로 가다”(2010년)에서 첫 번째 당찬 여자로 소개되었던 그녀는 무려 300명의 남자들에 섞여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여성이었다. 2012년 한 생물학자가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된 꽃을 그녀를 기려 ‘솔라눔 바레티애’라 명명하기도 했다.

부갱빌이 유명한 것은 부겐빌레아와 남태평양의 섬 중에 그의 이름을 딴 부겐빌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타히티’의 발견이었다. 1767년 윌리스가 발견하여 영국령을 선포했으나, 1768년 이를 몰랐던 부갱빌은 프랑스령을 주장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이 대립하다가 1880년 프랑스의 식민 통치 아래 놓인다.
 
「찌는 듯한 햇볕 속에서 선원들은 지칠 줄 모르고 단조로운 같은 일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선원의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육지다! 전방 좌현 8도 26분 방향에 육지가 보인다!”」
 
타히티의 아름다움과 주민들의 관능적인 풍습에 반한 부갱빌은 타히티를 새로운 도시 ‘누벨 시테르’라 명명했고 마치 에덴동산 같다고 회고했다. 부갱빌에 의해 알려진 타히티는 동양을 향한 유토피아 열풍을 일으켰다.

어린 시절 페루에서 생활했던 고갱은 원시 섬, 남쪽나라에 관심이 많았다. 20대 도선사였을 때도, 증권사 직원이었을 때도 그는 틈틈이 섬에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주식시장 불황으로 아내 결별한 후 35세에 전업 화가로 나서 미술전에 출품했으나 입상이 좌절된다. 1887년 실망한 고갱은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힌두교 영향을 받은 11점의 작품들을 그린다. 이 중 3점을 고흐의 동생 테오가 구입하면서 고갱은 고흐의 노란 작업실이 있는 아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눈으로 보이는 '무엇'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나 각각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시조로 불리는 그들의 기질은 너무나 달랐다.

고흐(1853~1890)와 공동 작업을 시작한지 9주 만에 결별한 고갱(1848~1903)이 향한 곳도 타히티였다. 그는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식민지관에서 여러 원시부족들의 옷차림과 생김새를 보고 고심끝에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타히
티로 향했던 것이다.

고갱은 생의 마지막 10여 년 동안 타히티에서 '타히티의 여인들(1891년)'과 딸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린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1897년)’ 등 60여 작품을 남겼다.


타히티의 여인들

고갱은 유럽의 전통적인 인상주의 대신 아프리카와 동양 미술의 강렬함에 끌렸다. 그는 뚜렷한 윤곽선과 단순화한 형태, 음영과 그림자가 없는 평평한 느낌의 색면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작품을 남겼다. 탈인상주의 화가로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 그의 작품은 피카소나 마티스와 같은 아방가르드avant-garde 작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불행했다. 프랑스로 보낸 그림을 친구들이 팔아서 돈을 부쳤지만 금방 날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타히티의 정치에 끼어들어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미 유럽화된 타히티를 떠나 찾은 마르키즈 제도에서는 가톨릭 주교와 다투는 등 좌충우돌하다가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과 유사한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꿈을 찾아 예술혼을 불태우는 고갱을 주제로 한 책이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1919년)였다. 달은 미술가의 이상을, 6펜스는 그와 반대되는 사회 물질적인 재화를 의미한다. 왜 하필 6펜스일까? 당시 영국에서는 12진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중년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가족과 편안한 삶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갈망을 찾아 집을 떠난다. 그는 파리 뒷골목에서 그림을 그리다 태평양 외딴섬 타히티로 떠난다. 그 곳 원시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다 나병에 걸린 그는 위대한 그림을 남기고 죽는다.」
 
부겐빌레아... 어느 날 공원에서 만난 디기탈리스에서 고흐를 발견했던 것처럼, 캄보디아의 부겐빌레아에서 고흐를 떠나 타히티를 찾았던 고갱으로의 지식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