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단테 알리기에리 : 리아트리스와 베아트리스
한여름 무더위에 찾아 나선 양평의 이재효 갤러리... 2층의 유리 통창 너머로 바라본 탁트인 바깥 풍경 사이의 독특한 조각들이 여느 미술관과는 다른 구도로 전시되어 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작품 소재였을까? 입구부터 가운데에 홈을 판 돌멩이를 진주 목걸이처럼 주렁주렁 매단 작품이 강렬하다. 일상의 나무, 돌, 못, 낙엽, 공구, 철근 등의 각종 재료를 그 성질과 형태에 맞게 한없는 반복의 미학으로 탄생한 작품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그 사이로 화려한 보라색의 리아트리스Liatris... 추위에 강해 월동이 가능하며 영어로는 타오르는 별blazing star이다.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리아트리스에서 베아트리스Beatrice를 떠올린다. 베아트리스는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대서사시 신곡神曲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의 프랑스어로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포르티나리 가의 축제에 참석한 9세 소년 단테... 8세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순간 소년의 영혼은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단테는 죽는 날까지 소녀를 마음으로 사랑했다. 9년 후 우연히 마주친 베아트리체... 뜻밖에도 그녀는 마치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상냥한 미소로 지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단테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 순간을 보내고 말았다.
단테는 관례에 따라 가문에서 정해준 여인과 약혼한다. 그는 베아트리체가 콜레라로 요절했다는 소식에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에 빠졌다. 26세에 약혼녀와 결혼한 그는 베아트리체를 향해 쓴 연시를 모아 청춘의 고뇌와 사랑의 참회를 담은 "새로운 인생"(1294년)을 출간했다. 오직 신의 절대적인 사랑만이 찬미의 대상이었던 중세 시대에 인간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는 정치에 뛰어든다. 당시 이탈리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기벨린당과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겔프당이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단테는 겔프당이었다. 1289년 캄팔디노 전투에서 승리한 겔프당의 단테는 피렌체 최고위직인 6인의 행정위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교황이 영토확장의 야욕을 드러내자 겔프당은 귀족 계급과의 연대를 꾀하는 흑당과 신흥 상인 계급의 권익 신장과 정치 세력화를 꾀하던 백당으로 분열한다. 단테가 속한 백당은 초기에 교황에게서 벗어난 자치정부를 주장하며 승리했으나 흑당의 반격에 패한다. 그는 뇌물 수수 및 횡령 등의 죄목으로 추방된다.
방황하던 단테가 목격한 것은 교회와 정치의 부패, 참혹한 민중의 삶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고전 문학의 걸작인 대서사시 "신곡神曲"(1321년)을 완성한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맞춰 구원을 향한 순례의 여정을 그린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총 100곡으로 이루어지며 지옥편이 유명하다.
지옥에서는 지상에서 지은 자신의 죄를 되돌려 받는다. 바람을 피우면 바람에 날아다니고, 탐식하면 괴물에게 먹히고, 낭비하면 돈주머니 같은 돌을 굴리는 형벌을 받는다. 또한 점술가들은 더 이상을 앞을 내다보지 말라는 뜻으로 머리가 180도 돌아간 형벌을, 위선자들은 무겁고 고통스러운 금빛의 납 망토를 입는 형벌을 받는다
"신곡"에서 단테의 첫사랑 베아트리체는 그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단테에게 문학적 스승인 베르길리우스를 보낸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비명과 악취가 진동하는 지옥을 지나, 참회와 회개 속에서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연옥을 통과하고, 결국 베아트리체와 함께 천국에 이른다. 신곡은 하느님의 섭리와 구원,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학, 역사, 전설, 종교, 철학, 자연 과학 등 인간의 삶과 지식에 관계되는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는 르네상스 문학의 지평을 연 불멸의 걸작이었다.
단테는 회개와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역설하며 베아트리체를 동정녀 마리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서양에서 베아트리체는 로미오의 줄리엣에 버금가는 연인의 대명사다.
리아트리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어둠 속에 방황하던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blazing star'였다. 인간을 신을 찾은 행복한 사람, 찾으려 애쓰나 못 찾은 불행한 사람, 찾지도 않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나눈 단테... 그는 단 두 번의 만남으로 인생의 뮤즈로 삼은 베아트리체를 찾아 나선 사람이었다. 14세 연상의 루 살로메를 사랑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50여 년간 모드 곤을 연모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 그들은 아홉 살에 만난 소녀를 잊지 못한 단테 알리기에리에게 말한다. You win.
"신곡"은 문학과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헤르만 헤세의 장편 소설 "데미안"(1919년)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짝사랑했던 여인도 베아트리체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싱클레어... 그는 친구들에게 으스대려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크로머에게 덜미 잡혀 돈을 상납한다. 비범하면서 중성적 외모를 가진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크로머에게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이후 진학한 싱클레어는 술에 빠져 지내다가 공원에서 만난 여인을 짝사랑한다.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그는 그녀를 "신곡"의 베아트리체라 부른다. 싱클레어는 방탕한 생활을 청산한다. 대학에서 데미안과 재회한 싱클레어는 그의 어머니이자 인생의 멘토 에바 부인을 만난다. 그는 그녀를 여자로서 사랑하고, 어머니로서 존경한다. 싱클레어는 에바 부인에게 어울리는 청년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후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은 싱클레어는 자신과 사망한 데미안을 오버랩시킨다.」
"데미안"의 주요 내용 중 하나는 카인과 아벨이다. 카인은 신이 아벨의 제물만 받자 시기심에 아벨을 죽이고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데미안은 왜 신은 카인에게 표식을 주어 보호했는지 반문한다. 데미안이 추구하는 아브락사스 신은 다면적이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주문인 '아브라카다브라'의 어원이기도 한 아브락사스는 그리스 영지주의에서 신이었지만 기독교에서는 악마였다. 에바Eva 부인과 데미안Demian도 영어로 이브와 악마를 뜻하는 데몬Demon을 연상시킨다.
근대 조각의 아버지인 오귀스트 로댕(1840~1917)도 "신곡"의 지옥편을 배경으로 '지옥의 문(1880~1917)’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속의 여러 인물상 중 ‘생각하는 사람(르 팡쎄에르Le Penseur)’우 욕심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진 군상들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단테(1265~1321)를 묘사한다.
타오르는 별blazing star, 리아트리스에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으로 이어진다.